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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 황룡골 황둔사지(黃芚寺址 .황룡사지黃龍寺址)

노촌魯村 2014. 1. 12. 20:58

 

 경주 황룡골 황룡사(경북 경주시 절골길 215-50)

황용휴게소(4번 국도)에서 황둔사지(황룡사지)까지 2.7Km(승용차 가능 15분 정도 소요.대형 혹은 중형버스 불가능)

 

 

 

 

 

황둔사지(黃芚寺址. 황룡사지:黃龍寺址.경북 경주시 황용동 산170-4

절터에는 주초석이 남아 있는 법당터와 함께 석탑 두기가 무너져 있다. 덕분에 폐사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느낌은 물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사리공과 같은 석탑의 구조도 볼 수 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2년, 당 정관 7년 계사(633)에 장인을 불러 약사상을 만들어서 절(황룡사)에 안치하고 황둔사(黃芚寺)라고 하였다고 전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유구는 없었다. 남아 있는 탑(폐탑)은 8세기말에서 9세기 것으로 보인다.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 때(799~800), 5년 동안 가뭄이 들어서 산에 풀과 나무가 다 말라죽었으나 유독 이 산의 풀과 나무는 봄철과 같고 계곡의 물은 더욱더 불어나서 풀과 나무는 물을 흠뻑 먹었다 하여 이 산을 은점산이라 하고, 절은 황룡사라고 하였다.
<불국사고금역대기> 기록에 의하면 담화(曇華)라는 스님이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은점산(隱霑山) 황룡사에 들어 가보니 절이 왜적에 의하여 모두 불타고 없어서 마음에 분개를 느껴서 조선 인조 원년(1623)에 황룡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 후 강희(康熹) 40년(1701)에 절은 폐사되었으나 스님이 남아 있어서 불국사에 속하고 심적암(深寂庵)이라고 절의 이름을 바꾸고 그 이듬해 중창하였다. 이때 화주는 숭흘(崇屹), 사차(思次) 두 사람이었다. 또 강희 47년(1708)에 심적암 법당을 중창하였다. 이때 화주는 찬홍(贊弘)이었다. 숙종 때인 1715년에 우연한 실화(失火)로 다시 중창하였는데 이때 화주는 국정(國淨)이었다. 그 다음 기록은 없어서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서탑

 

 

 

동탑

 

 

 

 

 

금당터

금당터의 주춧돌

 

금당터에서 본 폐탑

서탑

동탑 

황둔사지 축대

황둔사지에서 본 황룡골

 

황용휴게소에서 황둔사까지의 지도(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그림이 보입니다)

황용휴게소(4번 국도)에서 황둔사지(황룡사지)까지 2.7Km(승용차 가능 15분 정도 소요.대형 혹은 중형버스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