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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바다). 경남 고성 상족암 다녀왔습니다.

노촌魯村 2014. 2. 2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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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해)

김창흡(金昌翕·1653~1722)

    

山停野斷大觀存(산정야단대관존)

산도 들도 멈춘 곳에 장관이 펼쳐져

水與天連互吐呑(수여천련호토탄)

하늘까지 이어진 물, 뱉었다가 삼키누나.

萬古憑誰問增减(만고빙수문증감)

만고 세월 증감(增減)을 누구에게 물어보나?

太虛於爾作淵源(태허어이작연원)

너에게는 저 우주가 근원이라 해야 하리.

爲名爲博於斯盡(위명위박어사진)

명예 추구, 박학 욕심 저 앞에선 사라지니

堪樂堪悲可復論(감낙감비가부론)

기쁨이니 슬픔이니 말해서 무엇하랴!

詩欲摸奇知亦妄(시욕모기지역망)

그 기이함 묘사하는 헛된 노력 잘 알기에

不如長嘯枕松根(불여장소침송근)

휘파람 길게 불고 솔뿌리 베고 눕는다. 

            

김창흡(金昌翕·1653~1722):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부모의 명령으로 응시했고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김석주(金錫胄)의 추천으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고,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했다.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고 도(道)를 행하는 데 힘썼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 1721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외딴 섬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삼연집〉·〈심양일기 瀋陽日記〉 등이 있다.(출처: 브리태니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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