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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

노촌魯村 2014. 3. 8.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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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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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사적  제235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 (어암리))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출처:문화재청)
※(삼년산성 → 보은 삼년산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서문터(서문 1차 )
서문터(서문 2차 )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삼년산성 서문 구조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서문이 적에 의하여 함락되어을 경우:서문을 통과하면 장애물인 저수지 나타난다.

암벽에는 옥필(玉筆)· 유사암(有似巖)· 아미지 등의 글씨가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로 전한다.

북문지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삼년산성 북문 구조(성 밖에 이중의 장애물 차단벽 서치)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삼년산성 동문 구조(동문 밖에 옹성과 기능이 비슷한 지그재지 통로 설치)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동문터 수리 중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삼년산성 남문 구조(사다리가 없으면 출입 불가능)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사진출처 :KBS역사스페셜에서 캡쳐

 보은사

  보은 보은사 지장시왕도(報恩 報恩寺 地藏十王圖.충북  유형문화재 제313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280-1번지 )
보은사는 삼년산성 내에 위치한 사찰로 보은군지에 의하면 1902년 朴鏡荷 스님이 창건하였다.
錦湖堂 若效가 金魚를 맡고 萬聰․法任이 제작한 보은사〈지장보살도〉는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3열의 권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존은 꽃잎형태의 두․신광을 두르고, 왼손에 투명보주를 쥐고 있으며, 유희좌의 모습이다. 협시로는 화불이 표현된 석장을 든 도명존자와 관모에 경책을 매어 묶은 무독귀왕을 비롯, 十王이 제1·2열에 걸쳐 시위하고 있으며, 제3열에는 童子․童女, 判官, 直府使者, 牛頭羅刹·馬頭羅刹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경상도에서 활동하였으며, 일시 속리산에서 활동한 退雲堂 愼豈(謙)과 斗贊․定敏․性旻 등이 그린 예천 龍門寺〈地藏菩薩圖〉(1813)를 본 따 그려 주목된다. 지장보살의 錫杖이 道明尊者의 손으로 옮겨간 점만 제하면 두 작품의 본존 형태가 일치한다. 다만 용문사작에 비해 권속의 수를 줄였고, 약간의 형태적인 변화를 가미하였다. 특히 권속들의 일률적인 수평 배치는 신겸의 불화구도에서 줄곧 나타나는 특징이다. 화면의 향우측 하단의 찢기고, 화면 상단도 일부 훼손되었다.
이 불화는 華谷堂 琳性(靈駕)이 단독으로 시주한 것이다. 아마도 生前 화곡당의 遺志를 받들어 坦應堂 頓亨이 化主를 맡아 추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지장보살도〉외에 이들에 의해 이듬해인 1897년에는 법주사 팔상전〈팔상도〉, 대웅보전〈104위 신중도〉, 원통전〈관음보살도〉․〈신중도〉등이 일괄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畵記에서는 福泉庵․中獅子庵․上歡庵․汝寂庵 등 여러 암자와 그곳의 거주 승들을 밝히고 있으며, 이 같은 내용은〈팔상도〉의 踰城出家像 畵記(福泉庵․中獅子庵․上歡庵․兜率庵․上庫庵․水晶庵)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불화는 1896∼1897년에 걸친 법주사에서 대규모로 일괄 이루어진 불화불사의 한 작품이다. 작화를 의뢰받은 약효가 선배화사인 신겸의 화본(畵本)과 화풍(畵風)을 추구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제작시기가 명확하고 법주사 본사와 복천암, 상환암, 여적암 등 산내 말사 시주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등 지역 불화제작의 기법과 양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출처:문화재청)

보은 보은사 석조여래입상(報恩 報恩寺 石造如來立像. 충북  유형문화재 제312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280-1번지)

보은사는 삼년산성 北門址 안쪽에 위치한 사찰로 1970년에 간행된 『報恩郡誌』에 의하면 1902년 朴鏡荷 스님이 창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은사터는?성재절터?로 불리고 있어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 행궁터로 추정되기도 한다.
보은사 석조 여래입상은 일제강점기 보은읍 대야리 미륵댕이 산에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보은사 법당에 본존불과 별도로 봉안되어 있으며 목과 허리부분이 훼손되어 현재 3부분을 시멘트로 접합한 상태로 어깨이하의 佛身 부분은 원래의 것으로 허리부분이 절단되기는 하였으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조성당시의 彫刻과 불상양식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수인은 轉輪法印으로 보이며 오른손은 合掌하여 3, 4번째 손가락을 접고 있고, 왼손은 內掌하여 오른손과 동일하게 3, 4번째 손가락을 접고 있다.
大衣는 通肩으로 전후 면에 걸쳐 조각된 옷 주름선이 융기되어 양감을 보여주며 목에는 三道가 남아있고 발은 裙衣 밖으로 나온듯하나 현재는 파손되었다.
동체의 조각기법과 상호의 조각기법에서 상이점을 보이고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조화롭지는 않으나 수인의 형상과 전면은 물론 배면에 까지 이른 옷 주름의 유려함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소작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성 당시의 상호가 마멸된 상태에서 새로운 불두를 제작하여 결합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불두를 재사용하기 위해 다듬는 과정에서 얼굴이 작아지고 상호의 앞뒷면이 평평해져 조선시대 민불과 같은 형태로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상호와 동체의 조각기법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는 있으나 충실한 신체의 표현과 옷 주름의 양감 등 석조불상의 양식연구에 훌륭한 자료이다.(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