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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노촌魯村 2015. 2. 11. 01:00

전라좌수영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국보  제304호.전남 여수시 동문로 11 (군자동))

여수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출처 : 문화재청)

 

 

 

 

 

 

  

   

 

 

 

 

 

 

  

 

 

 

 

 

 

 

 

 

 

 

 

여수석인(麗水石人.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전남 여수시 동문로 11 (군자동))

여수진남관(국보 제304호) 뜰안에 서 있는 것으로, 돌로 만든 사람의 모습이다.
여수는 임진왜란 때 해전의 격전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영으로 있던 이순신 장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그와 인연이 깊은 유물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드느라 한창일 때 왜구의 공격이 심하자 이를 막기 위해 7개의 석인(돌사람)을 만들어 사람처럼 세워 놓았는데, 이로써 적의 눈을 속이어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한다.
원래의 7기 중에서 지금은 이것 하나만 남아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손은 팔짱을 꼈으며 그위로 도포자락이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시선은 유유히 적을 바라다 보는 듯하다.
비록 전하는 이야기이긴 하나, 임진왜란과 관련된 소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출처:문화재청)

 

 

 

 

여수 이량장군방왜축제비(麗水李良將軍防倭築堤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0호.전남 여수시 동문로 11, (진남관내) (군자동) )

이량장군방왜축제비는 전라좌수사를 지낸 이량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방왜축제(수중성)를 기념하기 위해 후대에 세운 비이다.
이량(1446∼1511)의 자는 자방(子房)이고, 본관은 함평(咸平)인데, 조선 연산군 3년(1497) 전라도 흥양(興陽)에 왜변이 일어났을 때 녹도(鹿島) 만호(萬戶)로 기용되어 적을 대파하고 많은 적병을 참살하였다. 그 공으로 당상관의 품계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종 2품)에 특진됨과 동시에 일약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전라좌수영 남쪽에 작은 섬이 하나 있었는데 이 섬과 돌산도 간의 해로(海路)를 차단하는 대역사를 단행하였으니, 깊은 바닷속에 바윗돌을 쌓아 수중성(水中城)을 구축함으로써 왜적들은 물론 어떠한 선박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수중성을 ‘장군성(將軍城)’, 혹은 ‘이량장군방왜축제(李良將軍防倭築堤)’라 칭하면서부터 섬의 이름도 자연히 ‘장군도(將軍島)’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량장군방왜축제비는 조선 숙종 36년(1710)에 세운 비를 영조 11년(1735)에 중수한 비로 조선시대 초기(1497년)에 왜구 방어용으로 쌓은 수중석성 축제(築堤) 기념비이며, 조선초기 관방사를 알 수 있는 국방유적에 대한 연혁과 관련 인물의 행적을 알 수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