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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麗水 統制李公 水軍大捷碑).여수 타루비(麗水 墮淚碑).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노촌魯村 2015. 2. 12. 00:30

 

고소대(姑蘇臺) :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雉城) 위에 세운 포루의 일종으로서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麗水 統制李公 水軍大捷碑.보물  제571호. 전남 여수시 고소3길 13 (고소동))

 충무공 이순신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이다. 전라남도 해남의 해남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와 함께 일제의 박해로 1942년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광복 이후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비(碑)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몸 윗면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졌으며, 비의 왼쪽에는 숙종 24년(1698) 남구만이 지은 비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하게 된 경위를 비롯하여, 이 때 여수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기록이 밝혀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여수 타루비(麗水 墮淚碑.보물  제1288호. 전남 여수시 고소3길 13 (고소동))

조선 중기의 명장인 이순신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하였다.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받침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비문은 ‘타루비’라는 비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를 세운 시기 등을 적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이 비를 세워두었다.(출처:문화재청)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 620) :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은 조선 후기 기실비.현감 심인조(沈仁祚)가 ‘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후세에 충무공 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장방형 비신 뒷면 음기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戊寅丁日立)"이란 명문이 있어 숙종 24년(1698)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소대에서 본 장군도와 돌산대교

진남관(좌수영다리) - 고소대 사이의 언덕받이 골목길에 있는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