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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

노촌魯村 2015. 6. 30. 00:30

 

관룡사(觀龍寺.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는 화왕산 군립공원 구룡산 병풍바위 아래 있는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신라 8대사찰의 하나로, 394년(내물왕 39)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大道場)을 이루었다. 748년(경덕왕 7) 추담(秋潭)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당우(堂宇)가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영운(靈雲)이 재건하고, 1749년(영조 25)에 보수하였다.

 

 

 

관룡사석장승(觀龍寺石長丞.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

관룡사로 가는 오솔길 양쪽에 서 있는 한 쌍의 돌장승이다.
사찰 입구에 두는 장승은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과 더불어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넣는 등의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수문장의 역할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수호신이 되고 있다.
왼쪽에 있는 남장승은 높이 220㎝ 둘레 70㎝의 크기로,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다. 툭 튀어 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이하며, 콧잔등에는 두 개의 주름을 새겨 놓았고,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송곳니 두개가 뻗어 나와 있다. 오른쪽의 여장승은 높이 250㎝, 둘레 80㎝로, 사다리꼴 모양의 받침돌 위에 구멍을 파서 세웠다. 상투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다. 두 장승 모두 몸체에는 아무런 글귀가 없으며, 육중한 몸매로 인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언제 만들어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신앙물로 민간의 소박한 미의식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범종루

  

관룡사원음각(觀龍寺圓音閣.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140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관룡사는 신라시대에 지었으며 원음각은 조선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그 이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을 보면 영조 39년(1763)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음각은 대웅전을 중심축으로 약간 서쪽으로 기울여 세운 것이 특색이다. 절 경내에는 관룡사 대웅전(보물 제212호), 관룡사 약사전(보물 제146호), 관룡사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519호),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 등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창녕 관룡사 대웅전(昌寧 觀龍寺 大雄殿.보물  제212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관룡사는 통일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경치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부분을 한층 높게 한 점이 특이하다.(출처:문화재청)

 

 

 

 

 

  

 

 

 

 


일제강점기의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昌寧 觀龍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臺座.보물  제1730호.경상남도 창녕군 화왕산관룡사길 171-0 (창녕읍, 관룡사))

경상남도 창녕군 관룡사의 목조석가여래삼불상은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이다. 본존불의 대좌 밑쪽에 묵서를 통해 숭정(崇禎) 2년, 1629년(인조 7) 기사(己巳) 10월에 불상조성을 시작해서 그 다음해(1630년) 5월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에는 현진(玄眞), 승일(勝一), 천민(天敏), 수영(守英)등 8인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의 대표 격인 현진(玄眞)은 17세기 초에 경남 함양 상령대보살상, 전라남도 구례 천은사의 목조보살상, 충청남도 보은 법주사 소조아미타여래삼불상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 상은 비교적 현진의 말년에 제작한 상이다.
본존 석가여래불좌상은 높이가 150cm로 비교적 큰상에 속하며 양쪽의 불상들은 본존보다 크기가 작게 120cm정도의 크기이다. 불상들은 얼굴형이 네모나고 코가 유난히 높고 크며 입과 턱 사이의 간격이 좁은 편이어서 상의 인상이 약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표정이다. 또한 불상의 옷주름 처리가 단순하고 넓은 면으로 율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부분의 폭이 짧은 편으로 불상의 안정감과 위엄스러움이 약간 쇠퇴되었다.
조각승 현진의 초기불상에서 보이던 예쁘장함은 사라지고 대형의 법주사에서 보이던 엄숙한 표정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천진스러운 모습에서 현진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각승 승일과는 처음으로 같이 제작하였으며 승일이 제작한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석가여래삼불상, 경상남도 하동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조상과 같은 상에서 그 양식적 계승의 특징이 보인다. 17세기 전반의 불교조각으로 불상양식이나 조각승들의 사승(師承) 관계와 양식의 계보를 잘 알려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세 불상자체가 보여주는 종교적인 무게감으로도 중요하여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여야 하다고 본다(출처:문화재청)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昌寧 觀龍寺 大雄殿 觀音菩薩壁畵.보물 제18916호.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昌寧觀龍寺大雄殿觀音菩薩壁畵)’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서 설법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선재동재(善財童子)가 방문하여 법을 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벽면 전체에 관음보살을 채워 크게 부각시켜 그렸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보채(補彩)가 이루어졌지만 좌우로 넓게 퍼진 보관과 영락장식, 옅은 수묵으로 그린 기암괴석과 대나무 표현,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의 모습, 유희좌(遊戱座)로 단정하게 앉은 보살의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18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얼굴 표현에 보이는 강한 음영은 보채가 이루어지면서 다소 강렬하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불화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영락으로 장식된 쌍개머리를 하고 상의에 천의를 걸치고, 백색 바지 위에 적색 치마를 입고 합장한 선재동자의 모습, 관음보살의 주처(主處) 보타락가산을 표현하면서도 특징적인 물가 표현을 하지 않은 것 등은 다른 후불벽 관음보살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다. (출처:문화재청)

 

창녕 관룡사 약사전(昌寧 觀龍寺 藥師殿.보물  제146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옥천리))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임진왜란 때 약사전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약사전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건물 안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매우 작은 불당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좋은 비교가 된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일제강점기의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石造如來坐像.보물  제519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였던 관룡사의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표현기법에 있어 절의 서쪽 계곡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큼직하게 표현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머리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 있어야 할 3개의 주름은 가슴 윗부분에 표현되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겉옷 안에는 두 가닥의 접힌 옷자락이 역시 도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손은 왼발 위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여 있는 독특한 손모양이며 왼손 위에는 약그릇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연속된 거북이 등모양으로 연꽃을 표현하고 있는 상대가 특이하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과 형식화된 세부표현 기법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고려시대에 이 지방의 장인이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관룡사약사전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관룡사 약사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이다. 관룡사는 구룡산 중턱에 자리한 절로, 많은 문화재를 전하고 있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절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다.
석탑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했고, 가운데기둥 양 옆으로 얇고 넓직하게 안상(眼象)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1층 지붕돌이 파손이 심한 편이며,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간략화되었다.
규모도 작아졌고, 각 부분의 양식이 간략해진 모습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출처:문화재청)

 

 

 

 

응진전

 

산신각

칠성각

 

 

명부전

 

 

 

관룡사부도(觀龍寺浮屠.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0-2번지 )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이 부도는 관룡사 내에 있는 7기의 부도 중 하나로, 절 북쪽의 화왕산으로 오르는 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2단의 바닥돌 위로, 아래·가운데·위의 세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쌓고,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사각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아래에 비해 윗부분의 몸집이 더 커 보인다. 아래 받침돌은 옆면마다 두 개의 공간을 만들어 무늬를 넣고,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가운데 받침돌 역시 조각을 두었으나 무늬가 뚜렷치 않고, 윗받침돌 밑면에 새긴 연꽃무늬 역시 많이 닳아있는 상태이다.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있었을 듯 하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부도의 구조와 조각솜씨들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록 많이 닳아있긴 하나, 창녕군의 대표적인 부도라 할 만큼 아름답고 정교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신라시대 때 관룡사(觀龍寺)를 건립하면서 관룡사의 유래(由來)와 재산(財産) 등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길이 보존케하고자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간용 목판(木板) 11개와 서적 1권이 전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출처:문화재청)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造如來坐像.보물  제295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8번지 관룡사 )

관룡사 근처의 용선대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산 꼭대기 높은 바위 위에 모셔졌으며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원만하고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양감이 줄어들고 약간 위축된 모습이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앉은 자세에서는 다소 둔중함이 느껴진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형(半球形)의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양감이 줄어든 신체 표현, 도식적인 옷주름선, 8각 연꽃무늬 대좌의 형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9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문화재청)

 

 

 

 

 

 

 

용선대에서 본 화왕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