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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다- 제423회 칠백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 거행 / 9.23. -

노촌魯村 2015. 9. 21. 17:31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다

- 제423회 칠백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 거행 / 9.23. -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임진왜란 시 순국한 칠백의사(七百義士)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칠백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를 오는 23일 오후 3시 충남 금산군에 있는 칠백의총에서 거행한다.

올해로 제423주기를 맞는 이번 제향 행사는 문화재청장을 비롯하여 지역 국회의원, 충남도지사, 금산군수, 칠백의사 후손 등 500여 명이 참석한다. 이번 행사는 ▲ 초헌관(칠백의총관리소장)의 분향(焚香, 향을 피움) ▲ 초헌관이 헌작(獻爵, 술잔을 올림)하는 초헌례(初獻禮) ▲ 축관(祝官)의 축문 낭독 ▲ 아헌관이 헌작하는 헌례(亞獻禮) ▲ 종헌관이 헌작하는 종헌례(終獻禮) ▲ 문화재청장의 헌화(獻花, 대통령 명의)와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향행제(祭享行祭) 후에는 의총참배가 이어지며, 다양한 부대행사를 통해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게 된다. 부대행사는 ▲ 전통예술공연(살풀이춤) ▲ 활쏘기 시연 ▲ 금산 지역 초등학생으로 구성된 ‘금산소년소녀합창단’이 금산문화원 국악관현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부르는 ‘칠백의총’ 노래 등의 합창으로 꾸며진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과 승장(僧將)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칠백의사가 금산 연곤평(延昆坪)에서 1만 5천여 왜적과 싸우다 전원 순절하여 그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신 곳으로, 민족의 빛나는 호국정신의 상징이자 그 숭고한 가치를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야 할 뜻깊은 유적이다.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는 앞으로도 일반인과 학생 등 칠백의총을 찾는 관람객들이 칠백의사가 보여준 조국수호(祖國守護), 신의단결(信義團結), 학행일치(學行一致) 정신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활쏘기 프로그램 등양한 문화행사를 지속해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글.사진 출처 : 문화재청>


칠백의총(七百義塚.사적 제105호)

 

 

칠백의총(七百義塚.사적  제105호.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52-1)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 1971년 깨어진 조각을 시멘트 등으로 다시 붙여 복원하였으나, 2009년 석재로 재차 복원하고 비각도 새롭게 건립하였다.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0년에 기념관·순의탑을 새로 지었다.(문화재청 자료)

 

 

 

 

 

 

 

 

 

 

 

 

 

 

 

 

 

 

 

 

 

 

 

 

 

 

 

 

 

 국방강화상소도

 근왕창의도

 토적맹약도

 전략회의도

 청주성탈환도

 금산혈전출전도

금산혈전순절도

 금산혈전순절도

 

 

 

 

 

 

 

 

 

 

 

 

 

 

 

 

조헌 관련 유품(趙憲 關聯 遺品.보물  제1007호.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216 칠백의총관리사무소)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충청도 의병장으로 금산벌판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사한 중봉 조헌(1544∼1592)이 남긴 유물로 총 6종 7점이다. 조헌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유품에는 『조천일기』와 문과에 급제했음을 알리는 임명장인 교지, 의병장 제수교서, 조헌종사문묘 교서, 치제문 2매 등이 있다. 간략히 살펴보면 『조천일기』는 조헌이 선조 7년(1574) 명나라에 질정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남긴 일기이다. 이 일기는 영조 10년(1734)에 왕명에 의해 간행되기도 하였다. 문과급제 교지는 조헌이 나이 24세에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한 교지로서 조헌의 관계문서로서는 제일 오래된 것이다. 의병장제수교서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임금이 조헌에게 충청도 의병장으로 제수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조헌종사문묘 교서는 1883년 고종임금이 조헌을 문묘에 제사지낼 것을 명해 내린 교서이다. 또한 치제문(致祭文)은 2매로, 1795년 정조와 1812년 순조가 조헌 영전에 그의 죽음을 기리며 보내는 제문이다. 이외에도 대나무를 조각하여 끈으로 꿰어 차도록 만든 화살통도 있다.(문화재청 자료)

박정희 대통령 기념식수(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