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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 남도진성(珍島 南桃鎭城)

노촌魯村 2015. 11. 28. 11:58

 

진도 남도진성(珍島 南桃鎭城.사적  제127호.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번지11)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백제 때 진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 중 한 마을의 중심지가 이곳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부터는 왜구가 나타나서 노략질을 계속해 오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의 관청과 백성들이 내륙지방으로 피해서 살다가 세종대왕 초에 돌아오기도 했다. 결국 세종 20년(1438) 해안지방에 주로 설치되던 군사조직인 만호부가 이 지역에 생기게 되고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은 그 이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남아 있으며, 둘레가 400여m 정도이지만,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출처:문화재청)
※(남도석성 → 진도 남도진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관아

객사

내아

진도 남동리 쌍운교 및 단운교(珍島南洞里雙雲橋및單雲橋.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294번지)

진도 남도석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무지개 다리이다. 남도석성(사적 제127호)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단운교는 옆에서 볼 때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다. 길이 4.5m, 너비 3.6m, 냇바닥에서 다리 중앙부위까지의 높이 2.7m로 작은 규모이다. 이 지방에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다리의 아치 윗부분에는 편마암질의 돌을 판석 형태로 사용하고 아랫부분에는 윗부분에 사용된 돌보다 약간 큰 강돌을 사용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치 부분인데, 다듬지 않은 납작한 모양의 돌을 세로로 세워서 불규칙하게 아치형태로 돌려 쌓았다.
단운교에서 약 40m 가량 떨어진 쌍운교는 개울의 너비가 단운교보다 넓어 쌍무지개 형식으로 만든 점이 단운교와 다르다. 단운교와 마찬가지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돌과 강돌로 쌓아 만들었다.
단운교가 세워진 시기는 1870년 이후로 생각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쌍운교는 주민들에 의해 1930년 즈음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 두 다리는 비록 규모는 작으나 단아한 멋이 있고,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투박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2011년 답사에서 본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남도석성)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사적 제127호.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 )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백제 때 진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 중 한 마을의 중심지가 이곳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부터는 왜구가 나타나서 노략질을 계속해 오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의 관청과 백성들이 내륙지방으로 피해서 살다가 세종대왕 초에 돌아오기도 했다. 결국 세종 20년(1438) 해안지방에 주로 설치되던 군사조직인 만호부가 이 지역에 생기게 되고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은 그 이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남아 있으며, 둘레가 400여m 정도이지만,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문화재청 자료)
※(남도석성 → 진도 남도진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삼별초는 남도석성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다. 배중손 장군도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진도사람 대부분이 살해되었고 남녀 포로 1만 명이 몽골로 끌려갔다. 이후 남도석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쳤고, 무너지고 고치기를 거듭했다. 지금의 모습은 1438년 이후 이곳에 수군만호부가 설치되면서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도개(천연기념물 제53호)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최초의 동물이 개라는 것은 구석기시대 화석에서 개의 유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능히 입증할 수 있다. 진도의 자랑인 진도개는 가축으로서 사육하게된 뚜렷한 기록이 없으나 구전된 바에 의하면 4가지 유래설이 있다.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최초의 동물이 개라는 것은 구석기시대 화석에서 개의 유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능히 입증할 수 있다. 진도의 자랑인 진도개는 가축으로서 사육하게된 뚜렷한 기록이 없으나 구전된 바에 의하면 4가지 유래설이 있다.

첫째, 남송시대 무역선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 당하였을 때 남긴 남송국 개가 상륙하여 진도개의 시조를 이루었다는 설.
둘째, 고려 원종때 삼별초군이 강화도에서 관군과 몽골군에게 항거하려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일이 있었다. 그때 몽골군이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관군과 함께 진도에 원정시 남기고 간 개의 후손이라는 설.
셋째,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하였던 국영(관마) 목장의 병견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당시 몽골에서 수입했다는 설.
넷째, 우리나라 고유견이 있어 번식유지해 왔는데 진도에 분포했던 개만이 육지와 격리되어 타견과 혼혈됨 없이 순수 번식으로 고유의 혈통을 보존하여 오늘의 진도개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진도 남동리 쌍운교 및 단운교 (珍島 南洞里 雙雲橋 및 單雲橋)

 진도 남동리 쌍운교 및 단운교 (珍島南洞里雙雲橋및單雲橋.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294 )

진도 남도진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무지개 다리이다. 남도진성(사적 제127호)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단운교는 옆에서 볼 때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다. 길이 4.5m, 너비 3.6m, 냇바닥에서 다리 중앙부위까지의 높이 2.7m로 작은 규모이다. 이 지방에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다리의 아치 윗부분에는 편마암질의 돌을 판석 형태로 사용하고 아랫부분에는 윗부분에 사용된 돌보다 약간 큰 강돌을 사용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치 부분인데, 다듬지 않은 납작한 모양의 돌을 세로로 세워서 불규칙하게 아치형태로 돌려 쌓았다.
단운교에서 약 40m 가량 떨어진 쌍운교는 개울의 너비가 단운교보다 넓어 쌍무지개 형식으로 만든 점이 단운교와 다르다. 단운교와 마찬가지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돌과 강돌로 쌓아 만들었다.
단운교가 세워진 시기는 1870년 이후로 생각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쌍운교는 주민들에 의해 1930년 즈음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 두 다리는 비록 규모는 작으나 단아한 멋이 있고,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투박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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