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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노촌魯村 2016. 4. 1. 07:37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국보 제288호.높이 74.0.명문 내용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銘文)의 내용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능산리 사지는 능산리 고분군과 동나성 사이에 자리한 절터이다. 동나성은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羅城의 동쪽 부분이고,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들이 잠들어 있는 왕릉으로 추정된다. 능산리 절터에는 목탑과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중문中門, 강당講堂, 회랑回廊, 공방工房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백제 창왕명 사리감은 능산리 절터의 목탑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발견되었다. 명문이 감실 전면 좌우에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 13년(567)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창왕은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아들로서 554년 왕위에 올랐다. 명문의 정해년은 서기 567년에 해당하며, 이때 목탑 심주心柱를 설치하기 위해 심초석을 세우고 사리감을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리감은 직육면체 화강석의 윗면 좌우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만들고 앞면에 사리공을 마련하였다. 사리공 입구 역시 윗쪽을 둥글게 다듬었고, 테두리를 따라 턱을 두었다. 사리공 안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능산리 절터는 왕릉인 능산리 고분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감이 절터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 절의 성격이 왕실의 원찰願刹, 특히 신라와의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고 왕릉을 관리하던 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출처 : 국립부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