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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관아문(保寧官衙門) 및 보령성곽(保寧城郭)

노촌魯村 2016. 5. 20. 22:39


보령관아문(保寧官衙門.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62-2번지)

◦ 조선시대 보령읍성의 남문(南門)임. 장초석(長礎石) 위에 기둥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당시 전국에 똑같이 만들어진 관아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정면에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친필로 전해옴.
◦ 보령현(保寧縣)은 고려초부터 붙여진 이름이며 1413년(태종13)부터 현감이 파견되었고, 1652년(효종3)에는 보령부(保寧府)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다시(1655) 보령현으로 강등되었음.
◦ 보령읍성은 1430년(세종12)에 현감 박효성 등이 축성을 완성하였고, 1432년(세종14) 현감 정태(鄭帶)는 140칸의 관아건물을 완성했음. (출처:문화재청)


조선시대 보령현(保寧縣)의 외곽에 쌓았던 보령읍성의 남문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나 1층에서는 양편의 기둥을 성벽(城壁)위에 걸쳐 세워 성곽의 일반 문루(門樓)건물처럼 중앙 1칸으로만 통행을 하도록 하고 있다. 보령관아(保寧官衙)내의 그당시 건물현황을 『여지도서(輿地圖書)』 공해조(公해條)에서 살펴보면 객사 10칸, 관사동헌(官舍東軒) 10칸만이 기록되어 있다. 구조는 기단이 거의 노출되지 않는 평탄한 지면위에 주형장초석(柱形長礎石)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운후 그위에 누각(樓閣)을 설치하고 4면으로 난간동자 위에 돌란대를 댄 간단한 난간을 세웠다. 기둥 상부의 공포(공包)는 무출목(無出目) 초익공(初翼工)계통인데 익공(翼工)뿌리 아래에 연(蓮)봉이 조각되어 있으며, 창방(昌枋)위에는 소로를 중앙칸 5개, 양협칸 3개씩을 배치하여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쳤는데, 그중 중앙칸 2개, 양협칸 1개의 소로에는 운공(雲工)이 끼워져 있다. 가구(架構)는 앞 뒤 평주(平柱)사이에 걸쳐져 있는 대들보 양편에 주두(柱頭)를 직접 놓고 종량(宗樑)을 받도록한 2중량(重樑) 5가연(架椽) 구조이며, 종량(宗樑)위에는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설치하여 지붕하중을 받도록 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건물의 전면에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출처:보령시청)

 

 

 


건물의 앞면에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보령성곽(保寧城郭.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66번지)

◦ 보령읍성은 1400년가지 처음에는 현 위치의 1km 남쪽 구성재 부근에 있다가 옮겨져서 서쪽 2km지점의 봉당성에 있었음. 국방 강화 차원에서 읍성의 신축이 이루어지던 때인 1430년(세종12)에 순찰사 최윤덕이 현재의 위치에 터를 잡고, 서산군수 박눌생, 보령현감 박효성 등이 힘을 합하여 완성한 석성(石城)임.
◦ 1431년 부임한 현감 정대(鄭帶)가 이듬해부터 객관(客館)을 비롯 성내 140칸의 건물을 완성하였음.
◦ 성의 둘레는 약630m에 달하고, 높이 약3.5m, 적대 8개소, 성문 3개소, 옹성 2개소, 여장 412타, 성내 우물 3개소, 해장 약 600여m를 두었다고 하며, 현재 성안에는 주포초등하교와 보령중학교가 있으며, 성벽은 복원된 구간과 무너진 상태로 보존된 구간이 있음.
◦ 성돌에는 당시 축성에 참여한 천안, 단양, 제천 등의 군현 이름이 새겨져 있고, 당시 건물로는 보령현의 정문이었던 해산루가 있는데, 해산루의 현판은 보령출신의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앞쪽에는 아현산성이 마주하고 있고, 뒤족에는 진당산성이 있음. (출처:문화재청)


보령성곽은 그 남문(南門)이 「보령관아문(保寧官衙門)」이라는 명칭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읍성의 축조와 관계된 기록으로는 『정대동헌기(鄭帶東軒記)』에 의하면 고려말(高麗末) 왜구(倭寇) 때문에 그 침입(侵入)을 받을 두려움이 있어 태조(太祖) 경진년(庚辰年)에 봉당(鳳堂)에 성(城)을 쌓아 방어의 장소로 삼았다는 것이나, 태조(太祖)때에는 경진(庚辰)이라는 간지(干支)가 없고 정종2년(定宗2年)이며 태종(太宗) 즉위년(卽位年)인 것으로 보아 1400년에 봉당성을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성(城)이 좁고 연못이 얕고 산세가 험준하며 우물이 없으므로, 세종(世宗) 경술년(庚戌年)(1430년) 가을에 순찰사(巡察使) 최윤덕(崔潤德)과 감사(監司) 박안신(朴安信), 병사(兵使) 이흥발(李興發)이 다시 성터를 살펴 봉당성(鳳堂城)의 동쪽 1리쯤에 있는 지내동(池內洞)의 당산(唐山) 남쪽으로 터를 잡았고, 서산군수(瑞山郡守) 박눌생(朴訥生)과 보령현감(保寧縣監) 박효성(朴孝城)이 공역(功役)을 헤아려 후일을 명하여 몇 개월만에 성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현감(縣監) 박효성(朴孝城)의 뒤를 이은 정대(鄭帶)가 1431년 겨울에 부임하여 1432년 성내에 건축을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 보령읍성은 세종12년(1430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의 총길이는 630m에 달하고 높이는 3m, 여장의 높이는 0.6m이다. 읍성내에는 현재 주포초등학교와 보령중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성벽은 학교를 지으면서 동·서로 약 200m가 흔적을 잃어 남쪽 성문 해산루와 성벽 70m 및 북쪽 성벽 360여m가 보존되어 있다. (출처:보령시청)


 

보령성곽 안의 보령중학교와 주포초등학교


보령중학교 쪽에 남아있는 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