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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

노촌魯村 2016. 7. 3. 08:56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보물  제463호.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번지)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신덕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출처:문화재청)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石棺.보물 제365.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6))

진공대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과, 그 옆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함이다.

본래는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터에 있었으나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신덕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한편 탑의 왼쪽에 따로 놓여 있는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지붕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듯한 뚜껑돌과 긴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이 함은 거의 완전하며 온화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940)으로 추측된다.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 국보 제104.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6))

시대 : 통일신라 말기 승려 염거화상의 사리탑.

내력 :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염거화상은 가지산문의 제2조로서 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체징에게 그 맥을 전하여 터전을 마련한 뒤 문성왕 6(844)에 입적하였다. 이 부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남아 있는데, 원소재지나 연대 등은 아직도 불확실한 점들이 있다. 원주 흥법사지에서 1914년경 서울의 파고다공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해방 뒤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경복궁 중건 공사로 1990년대에 국립고궁박물관(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뒷뜰로 옮겨졌다가, 2004년 현재의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앞뜰로 옮겨졌다. 이 부도 안에서 나왔다고 하는 염거화상명탑지(廉巨和尙銘塔誌) 동판(銅板)에 근거하여 844년 입적한 염거화상의 부도로 생각하고 있다.

양식적 특징 : 신라 부도 전형 양식의 기원이 되는 것은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부도이다. 이 부도는 마치 장고의 몸체를 연상케 하는 형태[고복형(鼓腹形)]의 연꽃 받침대에 8각당을 얹은 모습[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을 하고 있다. 염거화상의 부도는 이후 하대 신라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모든 부도의 기본 형태가 되고 있으므로 중요하다.

이 부도의 옥개석 지붕모양은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막새기와 모양, 밑면의 서까래 표현 등은 거의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조각되어 있다. 처마 밑에는 비천, 탑신에는 사천왕, 탑신받침 안상(眼象) 안의 천인(天人), 상대석의 연꽃잎, 중대석의 여러 무늬, 하대석의 사자 등이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8각형 건물 모양을 모사한 부도이다. 탑은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륜부에 머리장식이 탑을 옮기기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문성왕 6(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의 부도(880)에 이르면 9세기 하대 신라의 석조물에서 부도가 지닌 위치를 확연히 확인하게 된다. 9세기 경주의 중앙 귀족 문화를 본뜬 석탑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할지라도 새로운 양식인 부도의 건조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출처:원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