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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紅門) 및 월성위 김한신묘(月城尉金漢藎墓)

노촌魯村 2017. 6. 24. 21:41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용궁리))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이자 조선 영조(재위1724∼1776)의 둘째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옹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남편에 대한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의 열녀문은 훗날 정조(재위 1776∼1800)가 내린 것이다.
김정희유적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문 외에 옹주와 김한신의 합장묘·김정희 묘·김정희 고택이 있고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된 백송이 있다.
묘막터는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앞면 8칸·옆면 1칸 규모이며 근래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묘막터는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앞면 8칸·옆면 1칸 규모이며 근래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월성위 김한신묘(月城尉金漢藎墓.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조선 후기의 문신인 정효공 김한신(1720∼1758)의 묘소이다.
1732년 13세 때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과 제용감제조를 역임하였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던 그는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으며, 도장을 새김에 있어서도 뛰어나 인보(印寶:임금의 도장)를 새기기도 하였다.
그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곧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묘역에는 그와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