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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 영국사 대웅전(永同 寧國寺 大雄殿)

노촌魯村 2017. 9. 23. 22:50


영동 영국사 대웅전(永同 寧國寺 大雄殿.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산139-1번지 영국사)

천태산에 위치한 이 사찰(寺刹)은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명종때인 12세기에 원각국사에 의해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에는 금당(金堂)을 건립하고 국청사(國淸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공민왕(재위1351∼1374) 때 홍건적의 침략을 피하여 이곳에서 나라의 안정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였으므로 이름을 영국사라 고쳤다고 한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상을 모시는 법당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의 건물이다.(출처:문화재청)






 2010년 6월 19일 답사에서 촬영한 사진

 

 

 주차장에서 영국사 가는 천태산 계곡

 

 삼단폭포

 

 

 

 영국사 은행나무(영국사 일주문 역활을 함)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永同 寧國寺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1395-14)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1.4m, 가슴높이 둘레 11.54m 정도로 영국사 정문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졌으며,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큰 나무로 문화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영국사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때 마다 운다는 절설이 있는 있다. 최근에는 대구 지하철참사 때에도 울었다 한다. 

 영동 은행나무의 은행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은행나무 그늘에서 영국사에 관한 문화해설을 경청하는 답사객 

영국사 만세루

충북 영동에 자리한 천태산 영국사를 올라가다 보면 누교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다락(樓) 루' '다리(橋)  교'자 이름을 붙인 이 마을은 고려 말 피난 길에 오른 공민왕이 나라의 안녕을 빌기 위해 국청사(영국사)로 가던 개울을 거널 다리가 마당치 않자 백성들과 신하들이 칡덩쿨로 선반 같은 다리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영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찰로 원래의 이름은 만월사라 전한다. 고려 명종 때인 12세기에 원각국사에 의해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원(伊院) 마니산성(馬尼山城)에 머물 때 이 절에 와서 기도를 드린 뒤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평온하게 되었다 해서 영국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洗師)국사가 영국사로 바꾸었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현재 대웅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 요사채, 중요문화재로는 부도(보물 제532호)·3층석탑(보물 제533호)·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망탑봉3층석탑(보물 제535호) 등이 있다. 이밖에 절 입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영동영국사대웅전(永同寧國寺大雄殿.시도유형문화재 제61호)

영동영국사대웅전(永同寧國寺大雄殿.시도유형문화재 제61호 (영동군).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1397)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상을 모시는 법당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의 건물이다.  

영국사삼층석탑(寧國寺三層石塔.보물  제533호)

이 탑은 영국사 대웅전 앞에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위층 기단의 무늬는 모서리까지 침범할 만큼 크고 넓다. 기단 맨윗돌에는 네 모서리 끝부분에서 약간의 치켜올림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각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놓았으며,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있는 문짝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올려진 상태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각 4단씩이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하여, 조형 미술품의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도 간략화되던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자료)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있는 문짝 모양이 새겨져 있다.

 

 

 

 

 영국사원각국사비(寧國寺圓覺國師碑.보물  제534호)

영국사 경내에 있는 비로,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원각국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선사·대선사가 되었던 명승으로, 명종 4년(1174)에 입적하자 왕은 그의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하였다. 비의 형태는 거북 모양의 비받침인 귀부(龜趺) 위에 비몸을 세우고, 비머릿돌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귀부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을 보인다.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거북 머리는 퇴화되었고, 거북등의 6각형 무늬와 비를 끼워두는 곳의 덩굴무늬는 생략되었다. 비몸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비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고, 앞면 중앙에는 ‘원각국사비명(圓覺國師碑銘)’이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시대적 특징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몸에 비하여 비받침이 커서 안정감을 주는 반면, 비머릿돌이 지나치게 커서 중압감을 주고 있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비문을 지은 이는 한문준이고, 건립연대는 고려 명종 10년(1180)이다.(문화재청 자료)  

 

 

 

 

앞면 중앙에는 ‘원각국사비명(圓覺國師碑銘)’이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영동영국사원구형부도(永同寧國寺圓球形浮屠.시도유형문화재 제185호 (영동군) )  

영국사 내의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사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수가 없다. 탑의 기단부(基壇部)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8각의 아래받침돌을 세우고, 역시 8각의 윗받침돌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위가 반듯한 윗받침돌은 밑으로 한겹씩의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둥근 공모양이며, 지붕돌은 8각으로 여러 조각들이 생략되어 밋밋하고 투박하다. 지붕돌 위로는 꽃봉오리모양을 한 머리장식을 올려 놓았다. 각 부분의 조각들이 생략되거나 간략화되고, 연꽃잎이 한겹으로 되어 있어 고려말·조선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원각국사비 뒷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원각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자료)

 

영동영국사석종형부도(永同寧國寺石鐘形浮屠. 시도유형문화재 제184호 (영동군))

영국사 내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 뒤쪽에 서 있는 승려의 사리탑으로, 모셔진 사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마련된 기단(基壇)은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8각이다.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을 제외한 아래·윗받침돌에는 각기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는데 꽃잎은 모두 한겹씩이다. 그 위로는 종모양의 탑신(塔身)이 올려져 있는데, 그 위의 머리장식조차 종을 매달 때 쓰이는 고리를 떠올리게 하여 실제의 종과 거의 비슷하다. 바닥돌에서부터 머리장식까지 모두 6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종형 부도이면서도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연꽃잎도 모두 한겹으로 표현되어 있어 고려말·조선초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뒷편으로는 원각국사비가 서 있어서, 원각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자료)

 

영국사망탑봉삼층석탑(寧國寺望塔峰三層石塔.보물  제535호 )

이 탑은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500m 되는 곳의 망탑봉(望塔峰)이라는 작은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커다란 화강암을 기단(基壇)으로 삼고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은 암석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중앙에 돌출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기단은 기둥모양과 안상(眼象)을 조각하여 형태를 완성하였다. 그 위에 아무런 받침없이 그대로 탑신이 놓여있다. 탑신은 윗부분이 아래부분보다 좁아지는 몸돌을 쌓아올렸다. 1층 몸돌에는 네 면에 무늬없는 문짝모양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위·아래가 돌출된 액자형이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추녀는 수평의 직선을 이루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층이 5단이고 2·3층은 3단이다. 탑은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일정하지 않지만, 몸돌의 상부를 좁게함으로써 비교적 안정감이 있다. 기단을 한 층으로 하고 기단의 맨윗돌을 생략하는 등 부분적으로 간략화된 고려석탑의 유형을 보여준다. 각 부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인 12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문화재청 자료)

 

 

 1층 몸돌에는 네 면에 무늬없는 문짝모양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위·아래가 돌출된 액자형이다

영국사망탑봉삼층석탑(寧國寺望塔峰三層石塔.보물 제535호)의 서북쪽에 있는 흔들바위(앞으로 당겨야 흔들거림) 

영국사영산회후불탱(寧國寺靈山會後佛幀.보물  제1397호.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  

중앙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문수(文殊)·보현(普賢) 등 보살(菩薩)과 성중(聖衆)들을 빽빽하게 배치하였으며, 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비교적 제작시기가 이르다. 이 그림은 인문 일파가 주도하여 그린 전형적인 군도형식(群圖形式)의 작품으로 본존을 에워싸도록 주위를 빙 둘러 권속들을 배치하였으며, 상단에는 부드러운 중간 색조의 황·녹·홍색의 색구름을 둔 뒤 나머지 여백을 짙게 처리하여 공간감을 부여하였다. 또한 주변 인물들의 크기를 위로 갈수록 작게 그리고 모두 본존불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평면의 화면에 원근감을 나타냄은 물론, 예배화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겠다. 주 색조는 적·녹색으로 담채(淡彩) 계통의 밝은 홍색을 많이 사용하여 조선 초기적 경향이 강하며, 각 인물의 묘사에 있어 부분적으로 다소 경직된 면이 있기는 하나 단순한 듯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필치를 보여 솜씨가 뛰어남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테두리 하단 중앙 부분에 먹으로 쓰여 있는 화기 중의 “강희사십팔년사월일(康熙肆拾捌年四月日) 신화성영산일부봉안우(新畵成靈山一部奉安于)…화사(畵師) 인문(印文) 민기(敏機) 세정(洗淨)…”이라는 내용을 보아, 강희 48년(숙종 35년)인 1709년에 인문을 비롯한 민기, 세정 등 불화승(佛畵僧) 3인이 참여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 크게 유행한 군도형식(群圖形式)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로 조성연대(造成年代)와 제작자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17세기 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불화양식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영동민속향토전시관에 걸린 영국사 사진(지금과는 차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