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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 현풍 석빙고(達城 玄風 石氷庫)

노촌魯村 2020. 7. 4. 11:39

 

달성 현풍 석빙고(達城 玄風 石氷庫. 보물 제673호. 대구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 86 (상리))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 쪽에 마련된 북서향 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빙실은 길이 11.4m, 폭 4.32m, 높이 2.6m, 면적 49.25㎡이다. 빙실문과 바닥의 높이 차이는 60㎝로 크지 않은데, 근년에 수리하면서 새로 교체한 것으로 보이는 2단의 장대석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4개 틀어 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 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 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建城碑)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경주 석빙고와 창녕 석빙고, 안동 석빙고(安東石氷庫)보다 10여 년 정도 앞서 건축된 것으로 확인 되는 바 조선 후기 석빙고의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빙고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구전과 조선 초기에 빙고전(氷庫典)이라는 직제가 있을 때 만든 것이라는 등 확실한 축조 연대를 알 수 없었으나 1982년 11월 석빙고 주변 보수 작업 때 석빙고 축조 연대를 알려 주는 건성비(建城碑)가 발견되어 '崇禎紀元后二庚戌十一月'에 축조했음을 알게 되었다. 빙고(氷庫)는 평면이 장방형으로 너비 15m, 높이 6m이며, 넓이는 33제곱미터이다.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며 천장과 벽에는 4개의 잘 다듬은 무지개를 틀어 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빙고 내부를 형성했다. 입구에는 돌을 다듬어 문틀을 세우고 냇돌로 뒷벽채움을 했다. 외부에도 돌을 쌓아 점토로 다져 흙을 얹었다. 석빙고 꼭대기에는 환기 구멍을 냈는데 이는 경주 석빙고나 안동 예안 석빙고, 창녕 석빙고에서도 볼 수 있는 조선 시대 석빙고의 전형적인 양식이라 할수 있다. 1980년 9월 16일 지정. 1974년 석축 출입문 보수, 보호책 설치, 1981년 10월2일-11월 30일 성토 봉분 보수, 잔디 식재, 석빙고 환기구와 출입문 보수, 1982년 7월 19일-11월 18일 성토 공사, 조경 공사, 수목 식재, 보호책 신설, 표석 설치, 안내판 설치, 배수로 설치.

 

달성 현풍 석빙고 건성비(達城 玄風 石氷庫 建成碑)

비는 규수형(圭首形) 비신만이 있는 형태로 약간 상광하협형이다. 규모는 비신 높이 105㎝, 너비 49.5~42.5㎝, 두께 28.5~27.5㎝이다.

앞면 오른쪽에 '석빙고 건성비(石氷庫建成碑)'라 쓰여 있고, 앞면 가운데에 “현감 이후 등내(縣監李侯 等內)”라 적혀 있다. 등내(等內)는 벼슬아치가 벼슬을 지내는 동안을 이르던 말이다. 앞면 왼쪽에는 “숭정 기원 후 이 경술 십일월 일(崇禎紀元後二庚戌十一月日)”이라 적혀 있다. 경술년은 1730년이다. 뒷면에는 “도감 유학 곽재완(都監幼學郭在完) 감관 간관 곽천숭(監官刊官郭天嵩) 색리 율생 이동영(色吏律生李東榮) □수통정승 호왕(□手通政僧好往) 사령 김만천(使令金萬千) 호장 김성달 나규무(戶長金聲達羅奎武)” 등이 적혀 있다.(출처 : [『달성의 금석문』에서 전재함]

 

참고로 1742년에 건립된 창녕 석빙고의 비문을 소개[최진욱 판독, 노효경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오른쪽에는 “석빙고 비(石氷庫碑) 감관(監官) 김정일(金鼎一) 홍중채(洪重采)”라 쓰여 있고, 앞면 가운데에는 “현감 신후서 등내 영건(縣監申侯曙等內營建)”이라 적혀 있다. 앞면 왼쪽에는 도색호장하이도필(都色戶長河以圖筆) 도감 유학 강세복(都監幼學姜世復) 율생 조재갑(律生曹再甲)“이라 적혀 있다. 뒷면에는 “고직(庫直) 하선갑(河先甲) 석수(石手) 김기운(金己云) 숭정 기원 후 재임술 이월 초일 시 사월 초십일 필(崇禎紀元後再壬戊二月初一日始四月初十日畢) 사령최가음암회(使令崔加音岩囘) 오암회(吳岩回)”라 적혀 있다. 즉, 숭정 기원 후 두 번째 임술년[1742년] 2월 1일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4월 10일에 마쳤다는 내용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