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남

밀양 표충비(密陽 表忠碑)

노촌魯村 2020. 9. 2. 19:29

 

 

밀양 표충비(密陽 表忠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안길 4)

무안지서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현재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특이하게도 비몸은 까만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비문에는 표충사(表忠寺)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내용, 정유재란 이후 선조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 3천여 명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조선 영조 18년(1742)에 세운 비로, 이의현이 비문을 짓고,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앞면 위쪽에 새겨 놓은 비의 명칭은 유척기의 글씨이다.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 ’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사명대사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금까지 전해진 결과라 하여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출처 : 문화재청)

 

사명당(泗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의 충의를 새긴 비이다. 영조(英祖) 18년(1742)에 세웠다. 표충비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어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가 있던 조선인 3천명을 환국하게 한 사명당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서 영조 8년(1742)에 세운 비이다. 현재는 단층 팔작지붕의 비각에 서 있다. 옆에는 표충사(表忠寺)의 내력을 새기고 뒷면에는 서산대사 휴정의 행장을 썼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使)를 지낸 이의현(李宜顯)이 지었고,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유척기(兪拓基)가 두전(頭篆)을 썼다. 비신은 다른 비와 색다르게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이 비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 변란의 징후가 보일 때에는 땀을 흘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는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진 결과라고 하여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을 일으키고 선조의 의주(義州) 파천과 의주에서 선조로부터 8도 도총섭으로 임명 된 사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내용, 정유재란 이후 갑진년에 선조의 어명을 받들어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포로 3천명을 데리고 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유정대사의 어릴 때의 행적과 출가 사실 등을 기록하였는데 대사의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四溟)이고 속성(俗姓)은 임씨(任氏)로 밀양 무안에서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층 팔각지붕의 비각에 대리석(大理石)의 비신(碑身)과 화강암제(花崗岩製)의 비개(碑蓋)를 갖추고 있다. 비신 높이 2.7m, 비신 폭 0.96m, 두께 0.55m이며 비 전체 높이는 약4.0m이다.(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표충각(영규 대사. 사명대사. 서산대사)
표충각 좌벽에 모셔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