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공주 갑사 대웅전(公州 甲寺 大雄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의성 대곡사 범종루(義城 大谷寺 梵鍾樓)」,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 등 3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또한, 국보인『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명칭을 원래 명칭인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변경하였다.
공주 갑사 대웅전은 정유재란 이후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대체로 원형을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웅전 내부의 ‘갑사소조삼세불(보물)’이 1617년에 만들어졌고,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고려하면, 갑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17세기 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건축으로서 갑사 대웅전은 전환기 건축의 특징을 지닌다. 정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 구성인데, 정면이 5칸이면서 맞배지붕을 한 사례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정면과 배면 공포의 형식이 같고, 기둥 간격이 정면 중앙 3칸이 12척, 옆면과 나머지 주칸은 8척으로 나타나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목구조에서 휘어진 재료를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사용한 것은 경제적 상황과도 연관되어 이 시대에 새로 등장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갑사 대웅전은 17세기에 지어진 다포계 맞배집의 전형적인 형식을 공유하면서 조선 후기의 건축적 경향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 맞배지붕: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 다포: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 놓은 건축양식
또한, 연혁과 유래를 알 수 있는 각종 기록과 유물이 잘 남아 있고, 평면구성과 공포의 구성수법, 상부 가구와 닫집 등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등 17세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 닫집: 건물 내부의 불단 위에 또 하나의 지붕모양을 짜 올린 것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전소되어 17세기 중·후반인 1644년에서 1683년 사이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범종루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현존하는 누각 건축 중 17세기 전반의 것은 대부분 3칸 평면을 가지고 있고, 이후 누각 평면이 3칸에서 5칸, 7칸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경향을 살펴볼 때 범종루는 기존에 남아 있는 누각 건축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곡선이 살아있는 누각의 하부 기둥은 임란 이후 목재수급의 어려움, 조선 후기 자연주의 사상과 맞물려 살림집과 사찰 등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대들보는 대개 단일부재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범종루는 같은 크기의 부재가 2단으로 걸려 있다. 이처럼 2단의 보가 쓰이는 형식은 보기 드문 사례이며 상부 보 부재가 대들보 역할을 하고, 하부 보부재는 보받침 부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누건축을 비롯한 사찰불전에서 찾기 어려운 사례이다.
* 보: 기둥과 기둥 위에 수평으로 걸진 부재로 상부의 하중을 받는 부재
기둥 사이에도 포를 둔 다포계 양식이나 중앙 칸에 화반을 사용한 점은 주로 주심포와 익공양식에서 많이 쓰이는 형식으로 다포, 주심포, 익공의 공포양식이 고루 나타나는 절충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화반은 중앙칸에 올려져 상부가구를 받고 있는데 이는 상부구조를 견디기 위한 의도적 구성이며, 정‧배면이 좌‧우측면보다 크고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 화반: 기둥 사이에서 창방 위에 설치하여 상부 부재를 받치는 넓은 판재
* 주심포: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된 건축양식
* 익공: 기둥 위에서 전면으로 조각한 부재를 내민 부재(쇠서)를 놓아 꾸민 건축양식
* 창방: 기둥상부에 가로지르면서 기둥과 기둥을 서로 연결한 부재
공포의 첨차와 살미의 형태, 창방을 비롯한 다수 부재의 의장적 요소 등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적 특징이 잘 남아 있다. 특히, 중앙칸에 주간포를 생략하고 화반을 대체한 절충식 양식이 주목된다. 범종루는 의성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17세기의 양식적 변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누각 건축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 첨차: 공포에서 기둥위에 도리방향으로 살미와 십자맞춤으로 되는 짤막한 부재
* 살미: 공포에서 보방향으로 첨차와 직각으로 짜올린 부재로 초새김한 의장 부재
* 주간포: 기둥과 기둥사이에 짜인 공포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건립한 비석이다.
최석의 행적과 승평부의 읍민들이 팔마비를 건립한 사실은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 열전(列傳): 많은 사람의 전기(傳記)를 차례로 기록한 책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년(1597년, 선조 30)의 병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
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陰記)는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
* 음기(陰記):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비석은 상면이 둥글게 처리된 비갈형(碑碣形)이다. 비석의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cm, 두께는 약 16.5cm 이다. 전면에는 액을 만들어 글씨를 새겼는데, 액의 상부는 귀접이 형태로 하였다. 액의 크기는 높이 약 140cm, 폭은 약 63cm로서 그 내부에 ‘八馬碑(팔마비)’ 석 자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글자 한 자의 지름은 약 48cm로 상당히 크다. 비좌(碑座)의 크기는 가로 140cm, 세로 76cm, 높이는 33.5cm이며, 비를 세우기 위해 파 넣은 홈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8cm이다. 비좌의 상면에는 비신을 받치기 위한 호형(弧形)의 2단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높이는 각각 약 2.5cm 정도이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를 덮는 돌), 비신(碑身,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대좌(臺座, 불상을 놓는 대)를 갖춘 비와는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는 불교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 비갈형(碑碣形):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모양으로 만들어 비(碑)와 그런 것을 얹지 않고 머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인 갈(碣)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액: 비석에 액자처럼 도드라지게 구획한 것
* 귀접이: 물건의 귀를 깍아 버리거나 접어서 붙임
* 비좌(碑座): 비석의 몸체를 세우는 받침
* 호형(弧形): 활 같이 굽은 모양
순천 팔마비는 건립된 이후 중건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의 위상과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하여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팔마비의 주인공인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충분하다.
한편, 그동안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으로 불리던 것을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거조암’ 이란 명칭은 1912년 은해사(銀海寺)의 말사가 되면서 바뀐 이름으로 원래 명칭은 거조사(居祖寺)였다. 1478년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등 각종 문헌에 거조사로 명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2007년 조계종에 거조사로 사명을 인정받았고, 발굴조사(2003~2005)를 통해서도 상당히 넓은 사역에 불전과 탑 등이 확인되는 등 사찰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문화재 명칭은 ‘거조사’의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변경하였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공주 갑사 대웅전」, 「의성 대곡사 범종루」, 「순천 팔마비」을 체계적으로 보존·활용하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명칭 변경된 『영천 거조사 영산전』은 안내문 개선과 홍보 등을 해당 지방자치단체 및 소유자와 협의하여 개선해 나갈 계획이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공주 갑사 대웅전(公州 甲寺 大雄殿)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ㅇ 소유자(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갑사
ㅇ 구조/형식: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맞배지붕, 1고주5량가
ㅇ 건립시기: 17세기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157.4㎡
□ 지정사유
ㅇ 갑사 창건의 가장 오래된 연원은 6세기 신라 진흥왕대에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며, 갑사가 화엄십찰의 하나로 ?삼국유사?의 내용에서도 확인되어 적어도 9세기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ㅇ 갑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직후에 중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온 불전이다. 17세기 기록에 의하면 금당자리라고 불리는 곳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 절이 창건될 때의 법당의 위치는 아니지만, 대웅전은 정유재란 이후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로서 이후 그 형식을 대체로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웅전 내부의 ‘갑사소조삼세불(보물 제2076호)’이 1617년에 조성되었고, ‘갑사삼신괘불탱(국보 제298호)’은 1650년에 그려졌으며,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고려하면, 갑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17세기 초에 지어졌음을 증명한다.
ㅇ 17세기 건축으로서 갑사 대웅전은 전환기 건축의 특징을 지닌다. 정면5칸, 옆면 3칸의 건축규모는 사례가 많지 않으며, 8척, 12척 등 간단한 비례로 구성하였고, 맞배지붕에서 정면과 배면 공포의 형식이 동일하고 등간격의 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아직 조선 후기의 건축적 경향이 유행하기 이전의 상황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목구조에서 휘어진 재료를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새로운 미학을 탐구하는 태도 역시 이 시대에 새로 등장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갑사 대웅전은 17세기에 크게 확장된 다포계 맞배집의 전형적인 형식을 공유하면서 조선 후기의 건축적 경향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ㅇ 갑사 대웅전은 연혁과 유래를 알 수 있는 각종 기록과 유물이 잘 남아 있고, 중건 당시인 17세기 다포 맞배건물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 평면구성과 공포의 구성수법, 상부 가구와 닫집 등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또 대웅전 내에는 건물의 역사와 함께한 불상과 불화 등의 귀중한 소장 유물이 온전히 잘 보전되고 있다.
ㅇ 정면 5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갑사 대웅전은 충남을 대표하는 통일신라 시대 고찰의 주불전으로 17세기의 양식적 편년을 비롯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의성 대곡사 범종루(義城 大谷寺 梵鍾樓)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길 80
ㅇ 소유자(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대곡사
ㅇ 구조/형식: 정면 3칸, 측면 3칸, 중층 누각, 다포계 팔작지붕, 5량가
ㅇ 건립시기: 17세기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184.8㎡
□ 지정사유
ㅇ 대곡사 중창기와 사적기를 통해 고려말 공민왕 당시의 왕사인 지공대사가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960년 대곡사 앞 텃밭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의 양식이 통일 신라후기로 추정되어 사찰의 창건 시기는 신라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되며, 최소한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ㅇ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 〈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전소되어 17세기 중·후반인 1644년에서 1683년 사이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ㅇ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현존하는 누각 건축 중 17세기 전반의 것은 대부분 3칸 평면을 가지고 있고, 이후 누각 평면이 3칸에서 5칸, 7칸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경향을 살펴볼 때 범종루는 기존에 남아 있는 누각 건축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ㅇ 누하부 기둥은 자연곡선이 살아있는 도랑주와 민흘림의 원주로 되어 있고, 누상부 기둥은 전부 민흘림의 원주로 되어있다. 누하주에 사용된 도량주는 임란 이후 목재수급의 어려움과 조선후기 자연주의 사상과 맞물려 살림집과 사찰 등에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범종루의 중창연대인 조선 중·후기의 치목수법이 잘 나타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ㅇ 대들보는 대개 단일부재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범종루는 동일 크기의 부재가 2단으로 걸려 있다. 이처럼 2단의 보가 쓰이는 형식은 보기 드문 사례이며 상부 보부재가 대들보 역할을 하고, 하부 보부재는 보받침 부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며, 다른 누건축을 비롯한 사찰불전에서 찾기 어려운 사례로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ㅇ 주간에도 포를 둔 다포계 양식이나 각 정칸에 화반을 사용한 점은 주로 주심포와 익공양식에서 많이 쓰이는 형식으로 다포, 주심포, 익공의 공포양식이 고루 나타나는 절충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화반은 정·측면의 정칸에 올려져 상부가구를 받고 있는데 이는 상부구조를 견디기 위한 의도적 구성이며, 정·배면이 좌·우측면보다 크고 화려하게 나타난다.
ㅇ 공포의 첨차와 살미의 형태, 창방을 비롯한 다수 부재의 의장적 요소 등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적 특징이 잘 남아 있다. 특히 정·측면 정칸의 주간포를 생략하고 화반을 대체하여 절충식 양식을 가지지만 기존의 절충식 다포계 건축과 차이를 가지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현존하는 기록을 바탕으로 창건과 중창의 근거 또한 확인 할 수 있으며,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다. 특히 의성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17세기의 양식적 변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누각 건축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전라남도 순천시 영동 1번지
ㅇ 소유자(관리자): 순천시장
ㅇ 구조/형식: 비석 1기(높이 160㎝, 너비 76㎝, 두께 16.5㎝)
비좌(가로 140㎝, 세로 76 ㎝, 높이 33.5㎝)
ㅇ 조성연대: 1617년
ㅇ 수 량: 비석 1기
ㅇ 지정면적: 29.5㎡
□ 지정사유
ㅇ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건립한 비석이다.
ㅇ 최석의 행적과 승평부의 읍민들이 팔마비를 건립한 사실은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ㅇ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년(선조 30, 1597년)의 병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
ㅇ 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陰記)는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
ㅇ 비석은 상면이 둥글게 처리된 비갈형(碑碣形)이다. 비석의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cm, 두께는 약 16.5cm 이다. 전면에는 액을 만들어 글씨를 새겼는데, 액의 상부는 귀접이 형태로 하였다. 액의 크기는 높이 약 140cm, 폭은 약 63cm로서 그 내부에 ‘八馬碑(팔마비)’ 석 자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글자 한 자의 지름은 약 48cm로 상당히 크다. 비좌(碑座)의 크기는 가로 140cm, 세로 76cm, 높이는 33.5cm이며, 비를 세우기 위해 파 넣은 홈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8cm 이다. 비좌의 상면에는 비신을 받치기 위한 호형(弧形)의 2단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높이는 각각 약 2.5cm 정도이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를 덮는 돌), 비신(碑身,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대좌(臺座, 불상을 놓는 대)를 갖춘 비와는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는 불교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ㅇ 순천 팔마비는 건립된 이후 중건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의 위상과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하여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팔마비의 주인공인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충분하다.
□ 변경 개요
ㅇ 당초 명칭 :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ㅇ 변경 명칭 : 영천 거조사 영산전 (永川 居祖寺 靈山殿)
□ 명칭변경 근거
ㅇ 거조사(居祖寺)은 통일신라 효성왕대 또는 경덕왕대 왕명으로 지었다는 창건설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발굴조사 때 드러난 통일신라 추정 건물지와 출토 유물을 통해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말에 창건했음을 짐작은 할 수 있다.
ㅇ‘거조암(居祖菴)’은 1912년 은해사(銀海寺)의 말사가 되면서 바뀐 이름으로 원래 명칭은 ‘거조사(居祖寺)’였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각종 문헌 기록을 비롯한 실증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精選 知訥』: 去戊申年(1188)早春, 契內材公禪伯, 得住公山居祖寺, 不忘前願...
*『東文選』: 제117권, 曹溪山 修禪社 佛日普炤國師 碑銘에 ‘居祖寺’ 명칭 사용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2권, 慶尙道 永川郡편에 ‘居祖寺’ 명칭 사용
*『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2, 海印寺의 藏經에 ‘居祖寺’ 명칭 사용
*『五百聖衆請文』 : 居祖寺 古墟에 有一法殿하야 獨歸於陌上하니 有五百聖相하야...
*『영남읍지』: ‘居祖寺’ 명칭 사용 및 지도 표기
*『영천군읍지』: ‘居祖寺’ 명칭 사용 및 지도 표기
*『朝鮮佛敎通史』 : 慶尙北道永川郡八公山銀海寺 「寺法」銀海寺本末寺法 大正元年(1912)十月四日認可...本寺銀海寺之山內末寺目 白興庵 雲浮庵 白蓮庵 瑞雲庵 奇奇庵 忠孝庵 彌勒庵 中巖庵 妙峯庵 鳳捿庵 居祖庵...
*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등록증 : 사찰명 대한불교조계종 거조사
* 국세청 경주세무서 고유번호증 : 단체명 대한불교조계종거조사
*『永川 銀海寺 居祖庵』 : 창건 및 중건시 추정 건물지, 통일신라~조선에 이르는 174건 174점 출토
ㅇ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문헌기록상으로는 ‘거조사(居祖寺)’ 사명(寺名)이 12세기 말 고려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사용되다가 1912년 은해사 말사로 통합되면서 ‘거조암(居祖庵)’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실증자료에 근거한 ‘거조사(居祖寺)’ 사명을 조계종으로부터 인정받고 2007년에 사찰등록증을 발급받았다.
ㅇ 한편 발굴조사(2003~2005년)를 통해서 창건 당시에도 상당히 넓은 사역에 불전과 탑 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높은 산기슭에 스님이 수행하기 위해서 짓는 암자와는 다른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런 입지조건과 구성요소로 형성된 역사문화 환경은 ‘거조암’이 암자가 아닌 대중 사찰이었음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ㅇ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조암(居祖庵)’의 창건 당시 명칭은 알 수 없지만 문헌 기록과 실증 자료, 발굴조사를 통해서 고려 시대부터 ‘거조사(居祖寺)’ 명칭을 사용하였고 대중사찰 여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명칭 변경은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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