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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송림사 대웅전』『대구 동화사 극락전』『수마제전』3건 보물 지정 예고

노촌魯村 2021. 5. 25. 19:42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칠곡 송림사 대웅전(漆谷 松林寺 大雄殿)」,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인 「대구 동화사 극락전(大邱 桐華寺 極樂殿)」과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大邱 桐華寺 須摩提殿)」 등 3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

 

송림사의 주불전인 칠곡 송림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은 후 1649년에 중수되었으며 이후 1755년, 1850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옆면 3칸 규모인데 17세기 이후 재건한 불전이 정면 3칸, 옆면 2칸을 채택했던 추세와 달리 이전의 규모를 지키고 있다.

 

평면 규모뿐 아니라 실내구성에서도 당대 흐름인 중앙에 대형 불단을 설치하고 후불벽을 두어 예불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옛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비교적 시기가 올라가는 교두형 공포로 짰는데 이런 유형의 공포는 팔공산 일대 사찰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 특색이다.

* 교두형: 흔히 공포의 짜임에서 전면으로 길에 내민 활이나 날개모양의 살미형식이 아니고 끝을 각지게 깍아 낸 모양의 공포 형식

 

송림사 대웅전은 17세기 중엽 중수된 이후 18세기 말, 19세기 중엽 두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주칸의 크기를 재조정하고 외관이 달라지는 수준의 큰 변모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팔공산 일대 사찰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옛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역사성을 잘 계승하고 있다.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년(선조 33년)에 중건을 시작하였고, 그 중 금당(金堂)을 제일 먼저 건립했는데 지금의 극락전으로 판단된다. 이후 문헌기록을 통해 1622년에 중창되었음을 확인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건된 조선후기 불전 중에서는 건립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며, 처마와 창호, 단청 등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의 변화가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의장은 건립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 금당(金堂): 사찰의 본당으로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이르는 말

 

또한, 통일신라 당시 창건 당시의 위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창건한 당시의 위치에, 당시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부에 17세기 전반의 목조건축을 세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창건 당시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감주나 이주 없이 동일한 기둥 간격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상부 목조가구의 기본틀, 마루바닥 하부에 방전(方塼,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는 등 옛 기법이 많이 남아있다.

* 감주, 이주: 사찰 불전에서 불상 안치와 예불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내부의 기둥을 줄이거나, 기둥 위치를 뒤쪽으로 물리는 등 불전 평면의 공간 사용에 따라 적용하는 기법

 

극락전의 공포는 미세한 첨차 길이의 조정을 통해 공포와 공포의 간격을 일정한 비례로 구성하고 있으며, 제공의 내외부 끝을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있다. 또한, 추녀와 선자연이 걸리는 모서리 부분 퇴칸의 공포에 병첨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이 건물을 조영한 목수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17~18세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 제공 : 공포의 짜임에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이 짜여진 것

* 첨차: 공포에서 기둥위에 도리방향으로 살미와 십자맞춤으로 되는 짤막한 부재

* 교두형 : 송림사 극락전에서 설명

* 선자연: 추녀 옆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

* 병첨 : 다포계의 공포에서 귀공포와 옆의 공포(주간포)가 서로 맞닿아지는 각각의 첨차를 하나의 부재로 연결한 첨차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은 극락전의 뒤쪽에 있으면서 고금당(古金堂)이라고 전한다. 1465년(세종 11년)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뒤 1702년(숙종 28년)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현재의 건물도 17세기 이후의 기법과 옛 기법이 공존하고 있다. 수마제전은 사방 1칸 규모로, 다포식 공포를 가지며 맞배지붕으로 된 불전인데, 이처럼 사방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은 현재 국내에서 수마제전이 유일하다. 측면에 공포를 구성하지 않았지만 평방을 구성하고, 귀포의 모습에서 이전에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었던 것을 해체해 일부 부재를 재사용해 다시 지으면서 지붕형태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다포식: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 놓은 건축양식

* 맞배지붕: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수마제전의 공포 의장은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공포 의장 기법은 앞서 살핀 송림사 대웅전, 동화사 극락전 등과 함께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특징을 보여준다.

 

지붕가구는 삼량가로 구성되었으나, 중도리를 사용하여 마치 오량가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중도리 없이 하나의 서까래만 걸친 삼량가의 독특한 방식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지붕가구 기법은 다른 문화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전통 목조건축 지붕가구 기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종보 위에 설치한 고식의 솟을합장 부재가 남아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할 만하다.

* 삼량가‧오량가: 가구의 구조형식으로 도리(지붕가구 구성에서 기둥, 보와 함께 뼈대를 구성하며, 서까래와 직교하여 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임, 위치에 따라 처마도리, 중도리, 종도리로 불림)의 개수에 따라 세개면 삼량가, 다섯개면 오량가임. 오량가는 전후의 처마도리와 중도리가 각각 2개씩이고 최상단에 마룻대(종도리)를 두어 총 5개의 도리가 사용된 가구임

* 종보: 대들보 위에 설치되는 마지막 보

* 솟을합장: 종보 위에서 마룻대(종도리)의 좌우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ㅅ자 모양으로 버티어대는 부재

참고 : 수마제는 ‘극락’을 뜻하며, 수마제전이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인 극락전의 또 다른 이름이다.

3건의 보물 지정 예고된 문화재는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과 당시 이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같은 계보의 기술자 집단에 의해 조영된 건축물이다. 시대적으로 앞서고 각각의 구조적 특징이 나타나 역사, 학술적 조형예술적 측면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칠곡 송림사 대웅전」, 「대구 동화사 극락전」,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 등 3건에 대하여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칠곡 송림사 대웅전(漆谷 松林寺 大雄殿)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송림길 73

ㅇ 소유자(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송림사

ㅇ 구조/형식: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맞배지붕, 1고주5량가

ㅇ 건립시기: 17세기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147.92㎡

□ 지정사유

ㅇ 송림사 대웅전은 단층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5칸이란 정면 칸수는 현존하는 조선후기 불전 가운데서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한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 불전, 특히 주불전은 중층구조를 취하거나 정면 3칸 이상의 간살이 주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뒤 17세기 이후에 들어서 재건하게 되지만 이전의 규모를 회복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찰의 전각이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경향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전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시각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제 역할을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 전각이 유형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추세 속에서 5칸 규모로 주불전을 재건한 송림사 대웅전은 그 규모만으로도 3칸 불전이 주류인 다른 사찰과 차별되는 가치로 인정된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5칸 불전은 사례가 많지 않고 현재 대부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보호받고 있는 현실도 고려될 배경으로 판단된다.

ㅇ 송림사 대웅전은 1649년에 재건하면서 평면 구성에 있어서 동시기에 재건된 불전과는 불단과 후불벽 위치, 간살 구성에서 고식 특색을 견지한 점이 두드러진다. 불단이 대웅전 중앙에 있으며, 규모는 거대한 편으로 크기는 가로 13m, 세로 2.44m, 높이 1.03m이며, 전면에는 화려한 부조 조각을 새겼다. 중앙 세 칸에 불단이 점유함으로써 사실 5칸 불전이지만 송림사 대웅전의 실내 예불공간은 일반 불전에 비해 넓다고 보기 힘든 결과가 되었다. 실내에서 의례를 거행하게 되면서 실내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고 자연스레 고주열을 뒤로 물려(이주법) 불상 전면의 예불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변화한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었으나, 송림사 대웅전은 배면쪽 고주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가로 폭은 세 칸 너비에 맞춰 불단을 배치함으로써 실내 중앙부를 점유한 평면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주칸 설정은 만복사지 서금당, 무량사 극락전 등의 건물에서 보이는 고식기법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ㅇ 송림사 대웅전의 공포는 살미에 쇠서가 없는 형태로 교두형 공포로 분류된다. 이런 유형의 공포 양식은 비교적 시기가 올라가는 편으로 조선후기에는 널리 쓰인 방식은 아니다. 이 시기에 교두형 공포를 채택한 건물은 송림사가 자리한 팔공산 일대에 교두형 공포를 쓴 건물들이 집중 건립된 점은 하나의 특색으로 판단되는데, 그 근간에 승장 각원(覺元)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기술과 기법을 계승한 승장들이 이들 지역의 건물을 지었다는 분석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공포 외에도 이들이 지은 건물은 구조면에서도 영향 관계를 확인할 수 있어 향후 심도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ㅇ 구 부재를 지속하여 사용한 1850년 중수공사인데, 상량문의 내용과 재사용한 부재로 보면 이 시기 공사는 여러 부분에서 이전 대웅전과는 건축의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 재목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대웅전의 부재 즉 옛 재목을 이용하여 공사를 마무리 하였는데 이때 수리를 거치면서 지붕형식이 팔작지붕에서 맞배집으로 개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850년 중수공사는 신 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출발한 중수공사였고 구부재를 적극 사용하면서 건축형태의 변모라는 결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조선후기 주불전에서도 이런 실상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송림사 대웅전은 건축부재의 흔적과 상량문이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록 없이 부재만으로 추정하는 다른 불전과 차별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대구 동화사 극락전(大邱 桐華寺 極樂殿)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 1길 1

ㅇ 소유자(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

ㅇ 구조/형식: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팔작지붕, 2고주5량가

ㅇ 건립시기: 17세기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12,033㎡

□ 지정사유

ㅇ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년(선조 33) 금당암 영역에 건립하고 금당(金堂)이라 했다. 이전의 수마제전을‘고금당(古金堂)’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 대웅전 영역이 중심인 것과 달리 창건한 이후 동화사의 중심은 금당암이었다는 것이고, 극락전을 금당(金堂)이라 하고 수마제전을 고금당(古金堂)이라고 한 것은 이전의 금당이 수마제전이고 새로 건립한 금당이 극락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에 가람을 창건한 당시의 위치에, 당시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부에 17세기 전반의 목조건축을 현재에 전하고 있다. 창건 당시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감주나 이주 없이 동일한 기둥 간격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상부 목조가구의 기본 틀 역시 고대의 기법이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마루바닥 하부에도 방전이 깔려 있는 등 고식의 기법이 많이 남아있다.

ㅇ 현존하는 상부의 목조건축은 문헌기록을 통해 건립연대가 1622년으로 명확히 확인된다. 현존하는 임진왜란 이후에 재건된 조선후기 불전 중에서는 건립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며, 처마와 창호, 단청 등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의 개변이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의장은 건립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건물을 이루는 부재간 및 전체적인 비례가 미려함을 잃지 않고 있다.

ㅇ 극락전의 공포 의장과 구조 역시 주목할 만하다. 먼저 고대의 기둥 간격 위에 17세기의 다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첨차 길이의 조정을 통해 공포대 구성의 의장적 통일성을 확보한 점에서 이 건물을 조영한 목수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제공의 내외부 끝을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추녀와 선자연이 걸리는 모서리 부분 퇴칸의 공포에 병첨을 사용하는 방식은, 17~18세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기법으로, 특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大邱 桐華寺 須摩提殿)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 1길 1

ㅇ 소유자(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

ㅇ 구조/형식: 정면 1칸, 측면 1칸, 다포계 맞배지붕

ㅇ 조성연대: 1456년 건립, 1702년 중창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12,033㎡

□ 지정사유

ㅇ 동화사 수마제전은 1465년(세종 11)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뒤 1702년(숙종 28)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현재의 유구도 17세기 이후의 기법과 고식의 기법이 공존해 연혁과 부합하는 등 그 조영 시기가 명확히 확인된다.

ㅇ 수마제전은 사방 1칸 규모로, 다포식 공포를 가지며 맞배지붕으로 된 불전인데, 이처럼 사방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은 현재 국내에서 수마제전이 유일한 유구이다. 맞배지붕 불전으로 측면에 공포를 구성하지 않았지만 평방을 구성하고, 귀포에는 전각포를 구성하여 이전에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었던 것을 해체해 일부 부재를 재사용해 다시 지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이는 곧 본 건물의 연혁을, 1465년에 다포계 팔작지붕 불전으로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일부 피해를 입자 1702년에 해체한 후 부재 일부를 사용해 다시 지은 것으로 구체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ㅇ 수마제전의 공포 의장은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전ㆍ후면, 그리고 내ㆍ외 모두 제공의 단부에 수서나, 앙서를 만들지 않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공포 의장 기법은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으로서, 당시 이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동일한 계보의 기술자 집단에 의해 조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ㅇ 본 건물의 지붕가구 기법 역시 특기할 만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삼량가 구성이나, 내목도리를 받는 승두의 내단부를 안쪽으로 늘이고 그 아래에 판대공을 세워 지지한 위에, 종보를 올리고 종도리를 받는, 즉 오량가의 이중량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중도리 없이 하나의 서까래만 걸친 삼량가인,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되어있다. 그 결과 전후 도리간의 수평적 일제성이 강화되고, 더욱 안정적인 방식으로 종도리를 받을 수 있는 독창적인 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지붕가구 기법은 다른 문화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전통 목조건축 지붕가구 기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종도리와 내목도리 사이에 설치한 고식의 솟을합장 부재가 남아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할 만하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