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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陜川 海印寺三層石塔.庭中塔)과 합천 해인사 석등(陜川 海印寺 石燈)

노촌魯村 2021. 11. 27. 21:14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陜川 海印寺三層石塔<庭中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길 122 (가야면, 비로전))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 시에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보륜(寶輪:수레바퀴모양 장식),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의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수리 후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출처 : 문화재청)

 

통도사,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유명한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아래 위치한 이 삼층석탑은 넓은 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변 정중탑(庭中塔) 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이 석탑의 기단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인 이중기단이었으나 1926년 중수 시에 기단을 확장하고 더 높게 하여 삼중기단을 형성함으로 인해 신라석불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 기단부는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을 반영해 상층 기단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하나를 모각하고 있으며 탑신(塔身)에는 우주 이외의 별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 끝의 반전은 심하지 않다. 옥개석의 전각(轉角)에는 풍탁(風鐸)이 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탑의 상륜부(上輪部)에는 노반(露盤), 앙화(仰花), 보축(寶軸)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탑은 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말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불 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는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여 해인사의 탑을 중수하고 대장경을 탑 속에 봉안하여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되기를 바랐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1926년에 중수할 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아 태조가 중수한 탑이 이 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인사에 또 다른 탑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근래 사찰 중수 시에 경학원(經學院) 근처에서 신라 석탑재이 발굴되어 사중(寺中)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석탑은 대적광전의 중심선으로 우측으로 약 2.5m 비켜 있음으로 보아 단독 탑이 아닌 쌍 탑이었을 가능성도 연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탑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므로 이 역시 불가능하다. 다만 대적광전 앞의 공간이 너무 협소하여 높은 축대 아래 그나마 우측으로 비켜 자리한 것도 건립 당시의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된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상층 기단의 석함 속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 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석탑을 중수한 후에 다시 석탑 안에 봉안되었다.  탑은 화강암제로 높이 약 5m이다.(출처 : 문화재청. 참고자료:경상남도, 1995, <<경남문화재대관>>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아래 넓은 뜰에 자리잡고 있어 정중탑(庭中塔)이라 한다.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기본 형식이 나타나 있고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6m로 큰 탑에 속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3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이 있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가 있는데, 원래는 2층 기단이었으나 1926년 중수할 때 1층이 더해졌다.

기단부는 상층 기단 양쪽에 우주(隅柱)와 장주를 하나씩 모각했으며, 탑신에는 우주 이외의 별다른 조각이 없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전각에는 후대에 설치한 풍경(風磬)이 달려 있다. 처마 끝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 앙화, 구륜(九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1926년 6월 중수할 때 상층 기단의 석함(石函)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중수가 끝난 뒤 다시 석탑 안에 봉안했다.(출처 : 해인사)

        

안상( 眼象 ) 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 ( 拜禮石 )

합천 해인사 석등(陜川 海印寺 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길 122 (가야면, 비로전))

해인사 대적광전 아래쪽의 3층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으로, 불교의식을 행할 때 불을 밝혀두는 기구이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높직한 4각 바닥돌은 한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6㎝가량 층을 둔 다음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가운데기둥은 후대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모습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8각 화사석은 4면에 4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나머지 4면에 창을 뚫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으로, 경사면이 움푹하여 처마도 곡선처리 되었다. 꼭대기에는 몇개의 보주(寶珠:작은 공모양 장식)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출처 : 문화재청)

해인사 석등의 위치는 대적광전 아래 해인사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다. 네모난 기대석에는 한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있으며 하대석에는 밑에 8각으로 각을 두어 6cm 가량의 층을 두었고, 그 위에 복련(覆蓮)을 새겼는데 모두 8엽으로서, 간엽(間葉)을 나타내며 연잎 속에는 보상화문을 음각으로 새기고 있다.

간주석(竿柱石)은 8각이며 높이는 0.49m에 직경이 0.57m이다. 아깝게도 중간의 간주석은 결실되어 후에 보충하였다. 화사석(火舍石)을 받치는 상대석은 하대석을 역으로 뒤집어 놓은 형태로서 8각 앙화를 음각으로 새기고 연판 사이에 보상화문을 새기고 있다. 그 위에는 8각의 높이 6cm의 단을 형성하였으며, 그 위에 8각의 화사석을 놓고 있는데 높이 0.67m, 직경 0.68m이다.

8각의 화사석에는 각기 4개의 등창(燈窓)을 내었다. 그 나머지 면에 사천왕상을 음각으로 부조하였다. 화사석 위의 옥개석 또한 8각으로 직경이 1.4m이며, 귀꽃을 새기지 않고 있다. 옥개석 위에는 5개의 보주로서 조각을 마감하고 있다. 석등의 세부에 나타난 안상이나 문양이 우아한 조각수법으로 보아서는 통일신라시대 말경 또는 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재 높이 약 2m이다.(경상남도, 1995, <<경남문화재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