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시 명: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 – 다름이 만든 다양성”
■ 전시기간: 2021. 11. 24.(수) ~ 2022. 3. 20.(일)
■ 전시장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 주요전시품: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출토 황금보검 등 172건 253점
※ 지정문화재: 황남대총 출토 금목걸이 등 국보 2건, 보물 6건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최선주)은 2021년 11월 24일(수)부터 2022년 3월 20일(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특별전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다름이 만든 다양성’을 개최한다.
고대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이질적 문화 요소들이 어우러지고,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외래계 문물’이다. ‘외래계’란 토착, 재지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예전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와 당시 사람들에게는 비보편적이고 불안정적이며 낯선 것들을 말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갈등하고 빚어낸 교류의 산물인 외래계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관계망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출토 황금보검을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의 외래계 문물 172건 253점(국보 2건, 보물 6건)이 선보인다. 고대 한국 사회에서 ‘다른 사람’, ‘다른 문화’가 만들어낸 우리 역사 속 다양성을 4부로 구성하여 살펴본다.
제1부 ‘낯선 만남’은 외래계 문물을 이해하는 배경을 설명하는 인트로 부분이다. 이국적 외모를 지닌 사람들의 이미지를 담은 다양한 전시품을 통해 고대 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경험했을 낯선 만남의 느낌을 재현한다. 더불어 외래계 문물이 나타나는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교류’의 다양한 모습들을 모델화하여 함께 전달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교류가 환경적 요인에 의한 이주가 중심이 되었다면, 이후 국(國)이라는 형태로 각자의 경계가 형성되면서 교류의 모습도 변화하게 되었다.
낯선만남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언제 푸른 눈이나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국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유라시아 동쪽 끝 한반도에서는 고대부터 이국적 외모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경주 월성에서 출토된 터번을 쓴 토우, 덥수룩한 턱수염과 우뚝 솟은 코, 크고 깊은 눈을 가진 경주 용강동 무덤 출토 토용과 원성왕릉(괘릉)의 무인상이 대표적입니다.
일본은 물론 중국을 넘어 더 먼 서쪽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한반도인의 낯선 만남은 외래 문화요소와 기술 등의 전파를 동반하기도 하고 물질문화의 공간적 이동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언어, 문자, 종교, 사상, 예술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우리가 확인하기 어려운 다양한 정보의 교환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문물교류는 단순한 물자뿐만 아니라 각종 기술과 정보, 다양한 가치의 전달이 수반됩니다. 만남을 통해 교류가 시작되었고, 교류는 다양성을 만들어 갑니다.
사자獅子 : 사자는 고대인도, 페르시아, 아시리아, 소아시아 등 서아시아 지역에 많이 서식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사자는 서역의 동물로 용맹하고 위엄 있는 상징적인 존재로 여겼다. 주로 불교와 함께 전래되기 때문에 코끼리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상징미술에 자주 등장한다.
서역사람 모양 삼채(三彩胡人俑, 중국, 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중국 당에서 제작된 당삼채 서역인상이다. 중국은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한 이래로 이 지역의 문화를 꾸준히 수용해왔다. 중국 당의 수도인 장안은 이슬람 사절과 상인들이 북적대던 국제도시였다. 이 서역인상은 그들을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무인상(중국, 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중국 당에서 제작된 갑옷을 입은 무인상이다. 짧은 수염, 크고 둥근 눈을 가진 무인으로 당시 중국에서 인식하던 호인胡人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낙타모양 삼채(三彩駱駝. 중국, 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중국의 당삼채 낙타이다. 등에 봉이 하나 있는 낙타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로 서식하여 아프리카를 횡단하는데 사용되었다. 반면, 봉이 두 개 있는 낙타는 고비사막, 몽골·알타이지역 등 아시아 내륙에 주로 분포하였다. 이 쌍봉낙타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연결하는 최고의 교통수단으로 실크로드의 주역이었다.
사자가 새겨진 모서리기둥(통일신라) :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구조물의 모서리에 세워졌던 기둥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사자상이 일반적으로 위엄과 용맹함을 표현하는데, 여기 표현된 사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모습이 해학적이다.
모서리기둥(石柱, 통일신라. 경주 구정동) : 경주 구정동 방형무덤은 신라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네모난 돌방무덤으로, 둘레돌에 십이지상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이 모서리기둥은 방형무덤의 네 귀퉁이 중 하나이다. 기둥 옆면에는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에서 볼 수 있는 눈이 깊고 높은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무인상이 새겨져 있다. 그 옆면에는 역동적인 모습의 사자상을 표현하였다.
경북 경주시 구정동 석실분(石室墳·돌방무덤)의 모서리 기둥(통일신라 9세기경·경주박물관 ) : 이 석조기둥엔 방망이 하나를 어깨에 멘 무인(武人) 한 명이 조각돼 있다. 무덤 침입자를 막아내기 위한 비상용 방망이일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방망이 끝이 휘어져 있다. 일종의 폴로 혹은 하키 스틱이다. 왼쪽 다리를 약간 들고 서 있는 동적(動的)인 포즈로 보아 이 방망이는 운동기구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폴로가 통일신라시대 인기 스포츠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그 폴로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격구(擊毬)다. 이 무인의 얼굴은 한국인의 얼굴이 아니다.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 즉 서역인(西域人)이다. 그렇다면 왜 서역인이 폴로(혹은 하키) 스틱을 쥐고 있을까. 이는 폴로가 서역에서 전파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제2부 ‘스며들다’에서는 국가들의 정치ㆍ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교류가 구체화, 다양화되어 우리 역사에 스며드는 과정을 살펴본다. 요령식동검을 특징으로 하는 고조선 사회에 철기문화를 가진 수많은 중국계 유민들이 이주하고, 한군현이 설치되는 등 서서히 시작되는 전쟁과 갈등, 망명과 신기술의 전파로 나타나는 다양화된 교류 내용을 각종 금속기와 토기자료로 설명하고 있다.
스며들다 : 후기 구석기시대 동북아시아는 돌날, 좀돌날 등 대체로 공통된 문화를 공유하는 세계였습니다. 이후 신석기, 청동기시대를 지나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왔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특징적인 한반도의 선사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선사시대 이래의 문물교류 양상은 한반도 서북한지역의 청동기가 철기로 대체되던 시점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요령식동검을 특징으로 하는 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에 철기문화를 가진 수 만 명의 중국계 유민들이 이주·정착하고, 한군현이 설치되는 등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 영향은 한반도 남부에까지 미쳐 삼한사회에 한국식동검 문화가 등장합니다. 대체로 환경적 요인에 의한 이주로 설명되던 선사시대의 교류는 이제 망명, 신기술의 전파, 갈등과 전쟁 등 정치·사회적 요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화, 구체화되어 우리 역사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중국 동북지방 요령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동검으로 비파형동검 또는 고조선의 특징적인 검이라는 점에서 고조선식동검이라고도 한다. 마송리토기와 함께 고조선의 대표젂인 유물이다.
1. 쇠창(鐵槍) 2. 쇠괭이(鐵钁) 3. 반달쇠칼(半月形鐵刀) 4. 쇠도끼(鐵斧) 5. 쇠호미(鐵鋤) : 고조선. 평안북도 위원 용연동.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압록강 유역의 평안북도 위원 용연동유적에서 출토된 철기들이다. 한반도 최초의 철제품이라는 점에서 크게 각광받았으며, 전국시대 화폐인 명도전과 함께 연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어 왔다. 용연동유적을 비롯하여 요동지방과 서북한지방의 철기문화를 통칭하여‘세죽리-연화보’유형이라 부르고, 한반도 철기문화 발생과 관련하여 주목받았다.
청동 화살촉(銅鏃 삼한三韓. 완주 갈동. 국립전주박물관)
화살촉 양쪽 끝부분이 날개처럼 펼쳐지고, 단면이 마름모꼴인 양익촉이다. 단면 삼각형보다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완주 갈동의 철기들과 함께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쇠도끼(鐵斧) 2. 쇠낫(鐵鎌) : 삼한三韓. 완주 갈동.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완주 갈동에서 출토된 철기들로 쇠낫은 연나라 도성都城인 하북성 연하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형식이다. 현재까지 한반도 남부지역 출토품 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동주식동검(東周式銅劍, 중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중국에서 제작된 동검이다. 완주 상림리 출토 동주식동검과 같이 본떠 만든 제품에 비해 무겁고 마연되어 날이 서 있는 것으로 볼 때 실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주식동검(東周式銅劍, 삼한三韓, 완주 상림리,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 동주식동검은 춘추시대 후기부터 전국시대 초기의 약 200년 사이에 출현하여 한대에 걸쳐 사용된다. 도씨검挑氏劒, 중국식동검이라고도 부른다. 검 전체를 하나의 거푸집으로 만든 것으로, 검신과 자루, 칼자루 끝장식을 따로 만들어 결합하는 요령식동검이나 한국식동검과는 그 형태와 제작기법이 다르다. 완주 상림리에서 출토된 동주식동검은 전국시대 만기의 것들로 제작 후 마감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무게도 비교적 가볍기 때문에 동주식동검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동주식동검은 서북한지역의 새로운 철기문화 유입에 의한 압박으로 서해안을 따라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낙랑, 대방 등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도 낙랑 관련 자료가 급증하였다. 중부지역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낙랑계 토기들이 유입품과 현지 제작품의 구분이 어려울 만큼 재지화되는데 비하여, 가평 달전리에서 출토된 화분모양 토기와 짧은목항아리는 낙랑토기와 형태나 제작기법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이주민에 의해 유입되었을 섯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3부 ‘외연을 넓히다’에서는 삼한시기 초원과 바닷길을 넘어 본격적으로 외연을 넓혀가는 문물교류의 양상을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장식, 중국과의 교역품, 동남아시아의 유리구슬, 한반도 남부 해안지역의 일본계 유물 등으로 설명한다. 이로써 정치, 외교, 각종 민간 무역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지는 한반도와 유라시아 세계의 국제적 교류활동이 본격적인 문화 다양성의 서막을 연다.
외연을 넓히다
주로 동아시아 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문물의 교류는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그 외연을 확장해 나갑니다. 전통적인 동북아시아 해로와 해상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바닷길이 연결되면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반입된 유리구슬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한漢나라와 맞서면서 세력을 형성하던 흉노와 한반도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북방 유목민족의 상징적 동물장식 장신구와 금속제 솥들도 나타납니다. 나아가 한반도 남부 해안지역에 약 20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출토되는 일본의 야요이(弥生) 토기들의 존재도 확장된 문물교류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랑군 설치를 계기로 중국의 중원-낙랑·대방-한반도-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교류 네트워크가 상시화되었습니다. 한반도와 유라시아 세계의 다양한 국가들은 정치·외교·각종 민간 무역활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국제적 교류활동을 펼치면서, 본격적인 문화 다양성의 서막을 엽니다.
철솥鐵鍑 : 김해 대성동에서 청동솥, 경주 사라리, 김해 양동리에서 철솥이 출토되었다.
금속제 솥은 유라시아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서 주로 확인된다.
유목민들은 고정 화로를 사용하지 않고 솥을 지지대에 걸어 사용하였으며, 행군할 때도 말 등의 동물에 매달아 휴대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대략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유라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보이며 스키토-시베리아 동물양식이 출토되는 문화권과 일정 부분 그 궤를 같이한다.
1호랑이모양허리띠고리(삼한三韓,경주사라리).2말모양허리띠고리(삼한三韓,경주황성동).3호랑이모양허리띠고리(삼한三韓,경주탑동).4동물모양장식(삼한三韓,경주탑동)
북방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지역에서도 기원전 9-8세기부터 동물 모티브를 활용한 장식들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장식은 말갖춤, 의복과 결합되어 나타나고 흉노시대에 들어 더욱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천안 청당동, 영천 어은동, 청주 봉명동, 경주 탑동 등 삼한 각지에서 나타난다.
청동 세발솥은 중국 상주商周시대 이후 사용된 중요한 의례용기의 하나로 신분이나 정치적 권위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과 김해 양동리, 울산 하대 출토품이 있는데, 하대 출토품은 높이가 무려 49.8cm로 한반도 출토품 중 가장 크다.
청동거울(星雲文鏡 삼한三韓. 포항 성곡리)
한경漢鏡으로 일부 훼손되었지만 가운데 꼬지 주위로 연호문連弧文을 배치하고, 그 바깥으로는 성운문星雲文을 새겼다. 평양 정백동, 창원 다호리, 경산 임당, 경주 조양동 등 주로 변한·진한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된다.
청동거울(昭明鏡 삼한三韓. 대구 지산동)
소명昭明이라는 명문이 있는 이 거울은 중국 전한대에 제작된 것으로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이라고도 한다. 지름이 보통 8 내지 12cm 정도로, 중앙에 꼭지 혹은 연주문連珠文이 자리한다. 안쪽에는 내행화內行花, 연호문連弧文, 기하학문 등이 장식되고 바깥쪽에는 명문이 배치된다. 경주 조양동, 대구 지산동, 영천 어은동, 밀양 교동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1.반량전 거푸집(半兩錢鎔范 삼한三韓, 평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반량전(半兩錢 삼한三韓, 사천 늑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3. 오수전(五銖錢 삼한三韓,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철기문화가 유입되고 낙랑이 설치되면서 한반도에 중국 화폐가 등장한다. 여수 거문도에서는 오수전 980점, 광주 복룡동에서는 50여점의 화천 꾸러미가 발견되어 주목받았다. 그 외에도 사천 늑도 등 남해안의 도서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다수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동전들은 제작 및 유통시기가 비교적 명확하여 연대결정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사회의 상품거래 수단, 위세품, 의례용 등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독널(甕棺 삼한三韓,, 김해 회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야요이계 토기(彌生系土器 삼한三韓, 사천 늑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3. 야요이계 항아리(彌生系壺 삼한三韓, 사천 늑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4. 야요이계 옹(彌生系甕 삼한三韓, 사천 늑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5. 야요이계 옹(彌生系甕 삼한三韓, 사천 늑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6. 야요이계 항아리(彌生系壺 삼한三韓, 사천 늑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7. 야요이계 항아리(彌生系壺 삼한三韓, 남원 세전리, 전북대학교박물관 소장)
한국 청동기 – 삼한시기에 병행하는 일본 야요이시대의 토기들이다. 조리, 저장, 의례 등의 기능이 강조되는 옹,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이 기본을 이룬다.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야요이토기들이 만들어지는데 한반도로 반입되는 것들의 90% 이상은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규슈계 토기들이다. 대체로 야요이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1세기경으로, 한반도 동남해안지역에 집중되며 후기가 되면 그 수량은 급감하지만 그 분포범위는 중남부지역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야요이 시대(일본어: 弥生時代미생시대)는 홋카이도,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조몬인들의 조몬시대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550년에 이르는 시대의 명칭이다.
긴 목을 가진 도장무늬 병이다. 그 형태로 볼 때는 불교 전래 당시의 정병淨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이라는 뜻으로, 정병이라는 이름이 보편화된 것은 12세기 이후로 불교가 전래 당시에는 그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코국립박물관 소장 도장무늬 정병이나 석굴암의 범천상에서 보이는 정병 등의 사례로 볼 때 이미 물을 담는 용기에 대한 인식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양지는 다양한 소조상을 제작했으며 그중에는 사천왕사 팔부신장이 포함되어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2006 – 2008년 발굴로 사천왕사에 출토된 녹유신장상이 팔부중을 표현한 것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7세기 후반의 새로운 양식을 잘 보여주는 이 조각은 여전히 양지와 연관된 것으로 이해된다. 동서 목탑 기단부를 장식했던 총 48개의 벽전에 등장하는 3가지 유형의 신장상 중 하나로, 세밀하고 생생하게 표현된 신장과 악귀의 모습에서 조각가의 뛰어난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석장사는 고대 한국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조각승 양지가 머물렸다고 알여진 절이다. 양지는 7세기 후반 신라 불교 조각에 나타나는 새로운 양식과 관련된 인물로 서역 출신으로 인식되었으나 근래에는 남방 해로로 들어온 인도나 동남아시아 출신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석장사터에서 발견된 탑상전은 정방형 전돌 측면에탑과 불상을 번갈아 배치한 형태로, 최소 두 시기 이상(7세기 후반, 8세기 중반 – 9세기) 의 유물이 혼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석가모니의 고행상도 표현되어 있어 흥미롭다.
정면을 향해 꼿꼿이 선 보살상은 머리에 꽃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에는 둥근 테두리 안에 작는 부처가 새겨져 있다. 약간 길고 네모진 얼굴은 엄숙한 표정을 띠며, 어깨는 넓은 편이어서 근엄하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길고 굵은 목에는 복잡한 구슬 장식의 목걸이가 걸려 있고, 어깨로부터 늘어진 목걸이는 배부분에서 X자를 그리며 교차한다. 또 목걸이 장식의 연결부분마다 또 다른 구슬을 걸쳐 매우 번잡하게 나타냈는데, 신라 보살상으로는 드물게 많은 장신구를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중국 북방계통의 요소가 강한 복잡하고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이 특징인 이 보상상은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에는 새로운 형식의 불상이 등장한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법의를 걸친 입상으로, 허리를 꺾인 삼곡三曲 제세를 취하며 오른손에는 동그란 물건을 들고 있다. 현재 20여 점이 전하는데, 출토지가 명확한 경우는 모두 신라에 해당한다. 편단우견 법의, 옷 주름의 표현은 남인도, 스리랑카 지역에서 유행한 불상과 닮아있어 해로를 통해 신라로 전달되었거나 또는 중국을 거쳐 신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제4부 ‘다양성을 말하다’는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 내부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각국의 정치, 외교 활동과 한층 복잡해진 교류의 양상을 각종 외래계 문물을 통해 소개한다. 나아가 다양한 문화와 공존하는 통일신라의 양상도 함께 살펴본다.
다양성을 말하다
삼국시대 백제에서는 다수의 중국산 문물이 출토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진西晉대부터 남북조南北朝시기에 제작된 시유도기, 청자, 흑유계수호, 반구호, 양모양도기 등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입니다. 한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에서는 서역산 문물이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마립간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형태의 유리용기와 금속기에 세공된 서역계 문양들,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보검 등입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알려진 자료가 적지만 벽화무덤에 다양한 서역계 요소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왜계 문물이 집중됩니다.
3세기 후반 금관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하지키(土師器)계 토기, 파형동기, 통형동기와 5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 중남부 전역에서 보이는 스에키(須惠器)계 토기, 철제무기와 갑옷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외래계 문물들이 이렇게 특정 지역에 편중되는 현상은 단순히 삼국의 서로 다른 생활양식이나 취향 차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정학적 위치와 한반도 내부의 긴장관계 속에서 한층 복잡해진 각 국의 정치, 외교 활동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대금계 판갑帶金系板甲은 긴띠모양의 철판을 횡방향으로 구부려 만든 판갑의 한 형식이다. 이본 고유의 갑옷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왜계 판갑이라고도 부른다. 한반도에서의 출토 예가 증가하면서 그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본과의 교류의 흔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주로 당시 삼국의 정치, 군사적인 상황들과 관련도니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중층유리구슬은 흔히 금박 유리구슬로도 불리는데 투명한 유리관 사이에 금박을 입혀 금색을 의도한 구슬이다. 하지만 금속박을 분석한 결과 금박과 은박이 모두 확인되어 유리 사의 금속박보다는 이중의 유리임을 강조하여 최근에는 중층유리구슬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 백제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며, 최근의 분석 결과를 통하여 지중해, 서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것이 장거리 굥역을 통해 반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慶州 皇南洞 象嵌 琉璃玉. 보물.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慶州 皇南洞 象嵌琉璃玉)는 경주 황남동에 있는 신라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24㎝, 상감유리옥 지름 1.8㎝의 옥 목걸이이다.
8가지 정도의 옥을 연결하여 만든 목걸이로, 대부분의 옥이 삼국시대 신라 무덤에서 자주 출토되는 편이지만 상감유리환옥은 처음 출토되었다.
작고 둥그런 유리 옥에는 녹색 물풀이 떠 있는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 16마리와 두 사람의 얼굴이 지름 1.8㎝의 작은 표면에 여러 가지 색을 써서, 세밀하게 상감 되어 있다.
유리 옥의 제작지가 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얼굴 모습이 우리나라 사람과 차이가 난다. 수공 기술이 놀랍고 색조의 조화가 아름다운 걸작이다.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皇南大塚 北墳 金製 釧 및 金製 指環. 보물.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그 중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금 팔찌와 반지이다.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皇南大塚北墳 金製釧 및 金製指環)중 팔찌는 지름 7.5㎝ 내외로, 북쪽 무덤 덧널(목곽) 안에서 몸에 착용한 채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가 발견되었다. 좌·우 5개는 금막대기를 구부려서 만들어 장식이 없는 간단한 모양이다. 왼쪽 팔에 있던 1개는 길다란 금판을 동그랗게 말고, 그 위에 금판을 덧 대어 세공하여 남색과 청색의 옥으로 화사하게 꾸몄다.
반지의 지름 1.8㎝로 모두 19개가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는 손에 낀 채로 발견되었다. 두 가지 문양이 보이는데 하나는 가운데가 마름모꼴로 된 것이고, 다른것은 중앙에 격자문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당시의 장식품의 외래적 문양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924년 경주 봉황대 남쪽의 작은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신발의 바닥부분이다. 좌우대칭인 옆판 2매와 바닥판 1매로 이루어졌으며, 전시물은 그 바닥판이다. 다른 신발과는 달리 주조기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얇은 금속판을 놓고 망치나 끌과 같은 도구로 두드려 도드라지게 무늬를 만들었다. 바닥 가장자리에 2줄의 구슬무늬가 둘려져있고 그 안에 1줄의 불꽃무늬, 그 안에는 11개의 연꽃무늬와 거북등무늬가 일정하게 배치되었다. 거북등무늬 안에는 귀면, 쌍조문, 새,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동물, 기린,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이 보인다. 이러한 무늬들은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사수무늬, 연꽃무늬와 같은 불교적 요소가 복합되어 있다. 특히 거북등무늬는 육각형을 연속하여 이온 것으로 5-6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에는 후한後漢 말기에 도입되었고, 특히 북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경주 계림로 보검(慶州 鷄林路 寶劍)은 경주 황남동에 있는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길이 36㎝의 칼이다. 1973년 계림로 공사 때 노출된 유물의 하나로,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 있다. 시신의 허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자루의 끝부분이 골무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붉은 마노를 박았다.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 위쪽에 납작한 판에는 태극무늬 같은 둥근무늬를 넣었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과 그 형태와 문양이 다른데, 이러한 형태의 단검은 유럽에서 중동지방에 걸쳐 발견될 뿐 동양에서는 발견되는 일이 없어, 동·서양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띠고리를 물고 있는 도깨비 얼굴모양의 장식이다. 철로 기본 판을 만들고 그 위에 얇은 금판을 덧붙여 뒷면까지 감씬 흔적이 남아 있다. 뒷면에 철심이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단단한 곳에 박아 넣어 고정하는데 사용한 것 같다. 띠고리를 중심으로 위 아래 얼굴이 대칭으로 표현되어 있어 청색유리를 박아 넣은 눈은 총 4개가 된다. 도깨비 얼굴의 줄무늬 표현은 타출기법에 의한 것이다.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유리잔(天馬塚 琉璃盞)은 천마총 무덤 내에서 발견되었는데, 높이 7.4㎝, 구연부 지름 7.8㎝의 크기이다. 원래 2개가 발견되었으나 다른 하나는 복원이 불가능 할 정도로 파손되었다. 청색의 투명한 유리제로서 기포가 보이지 않고 구연부 부분 등에서 약간 은화(銀化)된 부분이 있을 뿐 높은 제작기술을 보여준다.
잔의 두께는 일정하지 않고, 구연부는 약간 밖으로 벌어져 있다. 전체 형태는 U자형을 이루며, 바닥은 원에 가까우나 닿는 자리만 안으로 불규칙하게 눌러서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표면에는 일정하지 않은 길이의 굵은 세로선을 그어 돌리고. 그 밑으로는 바닥만 제외하고 일정하지 않은 원형 무늬가 연속적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형 무늬는 깎아서 표현한 것이 아닌 굳어지기 전에 눌러서 만든 것이다.
넝쿨무늬唐草文가 있는 청동합이다. 넝쿨무늬는 서아시아의 직물과 금은제품에 자주 나타나며, 이러한 물건들이 교역으로 전해지면서 무늬도 함께 알려졌다. 특히 포도넝쿨무늬葡萄唐草文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는 직물과 그릇, 장신구 등 금은제품 뿐만 아니라 기둥이나 난간과 같은 건축부재의 장식에도 보인다.
황남대총 북분 은잔(皇南大塚北墳 銀盞)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 되었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은제잔은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신라 잔 모양의 그릇으로 높이 3.5㎝, 아가리 지름 7㎝의 크기이다. 밑이 평평한 잔으로 표면의 장식 무늬가 매우 특이하다. 아가리에 좁은 띠를 두른 뒤, 연꽃을 겹으로 촘촘하게 돌려 무늬를 장식하고, 그 밑으로는 쌍선으로 거북등 무늬를 연속시켰다. 거북등 안에는 각종 상상속의 동물 형상을 도들 새김으로(打出) 새겼다.
바닥 안 쪽 중앙에도 꽃무늬 안에 봉황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무늬의 표현 형식과 동물의 형상은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장식용 신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어 당시 외래문화와의 교류를 시사한다. 무늬 자체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구리거울과 연관이 있으나, 그 기원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다.
뿔잔角杯은 양이나 소의 뿔을 잘라서 술과 같은 음료를 마시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는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즐겨 사용했다. 그리스어로는 리톤이라고 하며, 서아시아지역에서는 의식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출토되는데 대체로 경주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포항 냉수리 출토품처럼 삼각형과 원점무늬를 뿔잔 표면에 새긴 모습에서 신라의 지역성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몸통의 형태는 오리모양 토기와 유사하지만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부리와 벼슬이 없고 목 부분에 갈기를 표현하였다. 낙타를 표현한 것인지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머리와 목의 형태를 고려하여 낙타모양으로 추정하고 있다. 낙타는 단봉낙타와 쌍봉낙타로 구분되는데, 단봉낙타는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남아시아에 분포한다. 쌍봉낙타는 고비사막과 중국 몽골에 주로 분포한다. 이로 보아 현동유적 집단의 교역 대상지역을 보다 넓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청동 자루솥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것들과 공통성이 많으며 모두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 예가 많으며 풍납토성 등 백제지역에서도 일부 나타난다. 호우총의 고구려 호우와 같은 예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중국제 청동기들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경유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1973년 발굴하여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자루솥(天馬塚 鐎斗)은 술, 음식, 약들을 끓이거나 데우는데 사용하던 그릇으로, 대부분 왕릉을 비롯한 큰 무덤에서만 출토된다.
이 청동 초두는 높이 20.5㎝, 몸통 지름 18㎝, 손잡이 길이 13㎝의 크기이다. 전체 형태는 납작한 구형의 몸통에 뚜껑을 덮은 형식으로, 밑에는 3개의 동물 모양 다리가 달렸다.
몸통에는 가로로 한 줄이 돌려 있고 이 위에 휘어진 뿔이 달린 양머리 모양의 액체를 따르는 주구가 달려 있다. 이와 직각되는 위치에 손잡이가 달렸는데, 모가 나 있고 속이 비어 있을 뿐 아니라, 끝에 못 구멍이 있는 점으로 보아 필요에 따라 나무 손잡이를 더 꽂아 사용했던 것 같다. 뚜껑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있고, 손잡이 위에서 경첩으로 몸통에 연결하여 여닫게 만들었다.
몸통 크기, 다리 높이, 손잡이 길이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양 머리 모양의 주구 형식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1986년에 조사된 용강동 돌방무덤 충토 토용이다. 이 문관상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손에는 홀을 들었는데, 홀은 왕족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들 수 있는 것이다. 얼굴은 덥수룩한 턱수염이 잘 표현되어 있다. 우뚝 솟은 코, 유난히 크고 깊은 눈 등 서역인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다.
황룡사 서금당지에서 출토된 원판형 귀걸이로, 가는 선과 작은 알갱이로 누금한 은제품이다. 중앙의 쌍조문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는데 7세기 이후 서역에서 전해진 문양 양식을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손잡이 부분은 오리가 머리를 틀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몸통 부분은 뿔잔의 형태이다. 오리의 얼굴이나 양각된 물새 등이 매우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유사한 형태가 미국 보스턴박물관, 중국 섬서성역사박물관 소장 당삼채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현재 표면에 유약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삼채였을 가능성도 있다.
서아시아의 공예품 중에는 입 부분이 8개, 12개의 둥근 호를 이룬 곡배曲杯가 있다. 타출기법으로 구연부를 꽃모양으로 만든 그릇인데, 통일신라시대에는 그 변형이라고 생각되는 꽃모양 접시가 황해도 평산과 충남 부여 부소산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또 최근에는 성주 기산리에서 청동제 팔곡장배가 출토되어 주목받은 바 있다.
이번 전시는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사람이 섞이고 갈등하면서 역사에 스며들어 ‘우리’를 만들고, 점차적으로 그 외연을 넓혀 문화적 다양성이 공존하기까지 고대 한국 문물 교류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한편, 전시 내용을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한 연출적 요소도 놓치지 않는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다양성’이라는 전시 컨셉에 맞추어 원웨이(One-way) 강제동선이 아닌 자유동선을 채택한 점이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휴식 공간을 마련하여 단순한 역사정보의 전달이 아닌 휴식의 공간, 힐링의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야외 LED 전광판에는 우리 사회의 문화 다양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전달하는 영상물로 전시에 대한 흥미를 더하고자 했다. 다양한 이주민들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이한희 애니메이션 감독의 영상도 주목할 만하다.
1998년 30만에 불과하던 한국 내 체류 외국인 숫자는 250만 명(2020년 기준)을 넘어섰다. 현재 우리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양한 국가와 인종,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새로운 의미의 ‘우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 우리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급속한 세계화 흐름 속에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번 전시가 고대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통하여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문화 다양성, 사회적 포용에 대한 이해, 상호 소통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리처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 1957~)는 ‘포용력(Tolerance)이 재능(Talent)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기술(Technology)을 발전시킨다’ 는 3T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력있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설명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정책도 이주민과의 관계에만 집중했던 다문화주의에서 벗어나 문화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을 위한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도 국제교류 전시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면서 다양한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국립경주박물관은 다양한 문화의 흔적들을 전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고대 한국 사회에는 다양한 이질적 문화 요소들이 어우러지고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외래계 문물’입니다.
‘외래계’란 토착, 재지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예전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와 당시 사람들에게는 비보편적이고 불안정적이며 낯선 것들을 말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고대사 속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갈등하고 공존하며 빚어낸 교류의 산물인 이 ‘외래계’ 문물들을 소개합니다. 그 문물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더합니다. 나아가 그 사람들이 왜 한반도라는 낯선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고대 한국 사회에서 ‘다른 사람’, ‘다른 문화’가 만들어낸 다양성을 통해서 세계화시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안내문과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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