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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 당간지주(慶州 芬皇寺 幢竿支柱)’ 보물 지정

노촌魯村 2021. 11. 23. 11:15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慶州 九黃洞 幢竿支柱)」「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라는 이름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 입구 남쪽과 황룡사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고대 사찰 가람에서의 당간지주 배치와 분황사 가람의 규모와 배치, 황룡사 것으로 보이는 파손된 당간지주가 황룡사지 입구에 자리한 예가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문화재명인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로 이름을 고쳐 지정하였다.

* 가람: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참고로, 당간지주는 당을 걸기 위한 당간을 고정하는 지지체로 통일신라 초기부터 사찰 입구에 본격적으로 세워진 조형물이다.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과 현재의 모습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외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두 지주 사이에 세웠던 당간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영 기법과 양식이 같은 두 지주와 당간을 받쳤던 귀부형 간대석이 원위치로 보이는 곳에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귀부형의 간대석은 남아있는 통일신라 당간지주 중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 당(幢):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설치되는 깃발로 일종의 불보살의 장엄구이다.

* 당간(幢竿): 당(깃발)을 걸기위해 높게 세운 기둥

*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

* 간대석(竿臺石): 당간을 받치기 위해 하부에 받친 석재단

 

좌우의 두 당간지주는 같은 조영 기법과 양식, 가공 수법을 보인다. 전체적인 형태는 사각 기둥모양인데, 상부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좁아지고, 정상부는 안쪽 면에서 바깥 면으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도록 가공하였다. 안쪽 면에서 바깥 면으로 관통하는 원형 간공(竿孔, 지름 15cm)은 상중하 3곳에 마련되어 당간을 고정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당간지주의 상중하 3곳에 간공을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하는 수법은 통일신라의 당간지주에서 많이 보이는 기법이다.

 

전체적인 형태와 외관 등이 현재 보물로 지정된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등과 유사하여 이들 당간지주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 경주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중요 사찰의 당간지주와 유사한 조영 기법과 양식을 보이고, ▲ 현존하는 통일신라 당간지주 중에서 유일하게 귀부형 간대석을 가지고 있으며, ▲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유사 당간지주의 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을 체계적으로 보존·활용하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나갈 계획이다.

귀부형 간대석 상면에는 사각형 좌대를 마련하여 앞뒤로 연화문을 장식하였는데, 그 표현 기법이 신라시대의 연화문과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좌대 한가운데에는 작은 사각형을 오목하게 시공하였으며, 한쪽 방향으로는 물이 빠져나가도록 좁게 낙수홈이 시설되어 있어, 상당히 정교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당간 하부의 평면 형태는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귀부형 간대석에서 귀두의 방향은 당간지주의 방향과 함께 사찰로의 진입 방향을 추정하는데 유용하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慶州 芬皇寺 幢竿支柱)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5-2

ㅇ 소유자(관리자): 경주시

ㅇ 구조/형식: 석조

ㅇ 건립시기: 통일신라

ㅇ 수 량: 1기

ㅇ 지정면적: 3㎡

□ 지정사유

1. 경주 분황사의 연혁과 당간지주

경주 芬皇寺는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사찰로 『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七處伽藍 중의 하나로 634년(선덕여왕 3년) 용궁의 북쪽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당시 분황사는 황룡사와 함께 왕실 차원에서 건립되었으며, 선덕여왕을 비롯한 여러 국왕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신라 선덕여왕은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 590~658년)을 분황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645년에는 자장의 요청으로 황룡사탑(皇龍寺塔)이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창건된 이후 황룡사와 함께 중요 사찰로서 중앙 정부나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 불교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현재 분황사에는 모전석탑(模塼石塔), 각종 석불(石佛), 당간지주(幢竿支柱), 팔각우물, 비좌(碑座) 등을 비롯하여 건물에 활용된 많은 석재와 기와 조각들이 남아있어 고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 분황사 입구 남쪽에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는 신라시대 분황사 가람의 규모와 배치, 고대 사찰 가람 상에서 당간지주의 배치, 주변 사찰들과의 배치와 방위, 황룡사지는 입구 쪽에 파손되었지만 황룡사의 것으로 보이는 별도의 당간지주가 유존하고 있는 점, 현재의 분황사 가람의 규모가 상당히 축소된 상황이라는 점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할 때 분황사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분황사 소속의 당간지주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2.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의 양식과 특징

이 당간지주는 일제강점기에 조사 당시 촬영된 여러 사진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때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두 지주 사이에 세웠던 당간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영 기법과 양식이 동일한 두 지주와 당간을 받쳤던 귀부형 간대석이 원위치로 보이는 곳에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하단부가 깊게 매몰되어 있어 기단부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존하는 간대석과 당간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별도의 가구식 기단을 시설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간지주의 하부를 깊게 매몰하여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당간을 견고하게 받치기 위한 간대석은 다른 당간지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기법의 귀부형 간대석을 마련하였다. 간대석은 신라 시대의 다른 귀부처럼 정연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 기법은 아니지만, 간략하게나마 귀두와 발 등을 표현하여 귀부형으로 마련했다.

귀부형 간대석 상면에는 사각형 좌대를 마련하여 앞뒤로 연화문을 장식하였는데, 그 표현 기법이 신라시대의 연화문과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좌대 한가운데에는 작은 사각형을 오목하게 시공하였으며, 한쪽 방향으로는 물이 빠져나가도록 좁게 낙수홈이 시설되어 있어, 상당히 정교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당간 하부의 평면 형태는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귀부형 간대석에서 귀두의 방향은 당간지주의 방향과 함께 사찰로의 진입 방향을 추정하는데 유용하다.

신라와 고려 시대의 당간과 당간지주에서 다양한 유형의 간대석이 마련되는데,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처럼 귀부형 간대석을 구비한 경우는 유일하게 확인되고 있다.

간대석의 조각 기법이 다소 형식화되어 있고, 사실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용도와 기능을 고려한 조각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치석 수법이나 조각 기법으로 보아 당간지주와 동일한 시기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당간지주는 동일한 조영 기법과 양식,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 당간지주는 귀부형 간대석의 좌우측에 ‘ㄷ’자형으로 홈을 파서, 지주 하단부의 일정 부분이 귀부형 간대석에 삽입 결구되어 견고하게 세워지도록 하였다.

당간지주의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 사각 석주형인데, 상부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좁아지도록 치석하였다. 당간지주의 바깥면은 지면에서 148cm 정도 되는 높이까지 1단 높게 하였으며, 바깥면의 좌우 측 모서리를 4cm 정도의 너비로 모죽임(부재가 맞닿는 부분 단면을 다듬음) 하였다. 또한, 당간지주의 정상부는 안쪽 면에서 바깥면으로 나가면서 부드럽게 호형을 그리도록 치석하여 다소나마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다.

당간은 당간지주의 안쪽면에서 바깥면으로 관통하는 원형 간공(지름 15cm)을 상중하 3곳에 마련하여 간을 끼워 고정하도록 시설하였다. 그리고 안쪽 면 꼭대기에 마련되는 간구는 시공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간지주의 상중하 3곳에 간공을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하는 방법, 당간지주의 바깥면이나 앞뒷면을 1단 높게 하거나 낮게 하는 치석 수법은 통일신라 당간지주에서 많이 적용된 기법이었다.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당간지주의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마무리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정성스럽게 치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주 지역에 건립된 다른 당간지주와 마찬가지로 정연하면서도 안정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당간지주의 하부를 1단 높게 치석하고, 외곽 모서리를 모죽임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적용한 점이나 관통된 원형의 간공을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했던 기법 등을 비롯하여 전체적인 지주부 형태와 외관 등이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등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들 당간지주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3.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의 가치와 의견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의 다른 당간지주들처럼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깔끔한 치석 수법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의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마무리하는 등 바깥 면을 기교 있게 치석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우수한 석공에 의하여 설계와 시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경주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중요 사찰의 당간지주와 유사한 조영 기법과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과 비교하였을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관통된 원형의 간공을 상중하 3곳에 마련하였으며, 통일신라 당간지주 중에서 유일하게 귀부형 간대석을 마련하여 당과 당간에 대한 상징이나 의미를 더하였다. 이처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전체적인 조영 기법과 양식 등을 통한 역사, 학술, 예술, 기술 가치 등을 검토하고, 이미 지정된 국가 지정 당간지주의 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