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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육신사(六臣祠) 및 달성 태고정(達城 太古亭)

노촌魯村 2022. 2. 9. 01:49

충절문忠節門

육신사(六臣祠.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묘리 640])

육신사(六臣祠)는 사육신인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와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을 모신 사당이다.

육신사는 묘골 아름 마을 가장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외삼문과 숭절당(崇節堂), 사랑채 2동, 내삼문인 성인문(成仁門), 사당인 숭정사(崇正祠), 태고정(太古亭), 태고정 안채 등이 있다.

배치는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가장 높은 곳에 제향 공간인 성인문과 숭정사가 일곽을 이룬다. 한 단 낮은 공간은 태고정과 태고정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태고정 전면에 대지를 한 단 낮추어 전사청과 제향 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숭절당과 사랑채 2동이 ‘ㄷ’자형으로 자리하면서 주변에 방형의 토석 담장을 돌려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숭절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숭정사에서 열리는 제사 때 사용하는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의 역할과 제관(祭官)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된다.

평면은 왼쪽으로부터 온돌방, 2칸 대청, 2통문 온돌방, 부엌이 이어져 있다.

부엌 상단에는 다락을 두어 제구를 보관하고 있다. 사랑채 2동은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원래는 숭절당과 오른쪽 사랑채가 'ㄱ'자형을 이루었는데 숭정당을 건립할 때 왼쪽 사랑채를 건립하여 현재와 같은 배치가 되었다.

오른쪽 사랑채의 평면은 부엌과 온돌방 2칸으로 이어져 있고, 왼쪽 사랑채의 평면은 2칸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숭정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육신과 박중림의 위패를 모시고 있어 사호(祠號)를 육신사가 아닌 숭정사로 하게 되었다.

태고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조합된 기와집이다. 평면은 동쪽에 2칸의 대청, 서쪽에 2칸의 방을 둔 단순한 구성이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 2칸 방은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태고정의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ㄱ'자형으로 부엌과 방, 대청 2칸에 방 1칸이 연결되어 있다.

현재 육신사에는 숭정당, 숭절당, 숭절당, 사랑채, 외삼문, 내삼문 등의 건물과 보물 제544호로 지정된 달성 태고정과 태고정 안채 등이 남아 있다.

달성 태고정은 1479년 박일산(朴壹珊)이 건립한 것으로 종택에 딸린 별당 건물이다. 이 밖에 사육신 육각비를 비롯하여 박정희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 박준규국회 의장의 기념 비석, 헌성 방명록 비(獻誠芳名錄碑), 제13·14·15대 국회 의장 송산(松山) 박준규 생가 터 표석 등이 세워져 있다. 묘골 아름 마을 입구에는 사육신 기념관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사육신 육각비
헌정방명록獻誠芳名錄
정충대절精忠大節 만고강상萬古綱常

精忠 :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순수하고 한결같은 충성. 大節 : 대의(大義)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

萬古 : 오랜 세월을 통해 변함이나 유례가 없음. 綱常 : 삼강과 오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람이 지켜야  도리를 이른다.

 

박정희 대통령 방명록(육선생지충절六先生之忠節 탱주만고강상撑拄萬古綱常 육선생의 충절은 오랜 세월을 통해 변함이나 유례가 없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보여 주는 버팀 기둥이다)
최규하 대통령 방명록(정충대절精忠大節 천고무상千古無雙)
박준규 국회의장 방명록
충의사忠義祠

박중림(朴仲林) :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한석당(閑碩堂). 증조할아버지는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박숙정(朴淑貞)이고, 증조할머니는 대언(代言)을 지낸 민시(閔蒔)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박원상(朴元象)이며, 할머니는 판밀직부사(判密直副使) 홍언유(洪彦猷)의 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를 지낸 박안생(朴安生)이고, 어머니는 한성부 윤(漢城府尹) 김휴(金休)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부인은 총제(摠制)를 지낸 김익생(金益生)의 딸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 김씨와 사재령(司宰令) 이덕배(李德培)의 딸 증정경부인 신평 이씨(新平李氏)이다.

아들 5형제 중 큰아들이 충정공(忠正公)박팽년(朴彭年)이다. 박중림의 후손들은 현재 하빈면 묘리 묘골에서 세거하고 있다.

박중림(朴仲林)[?~1456]은 1417년(태종 17) 생원시, 1423년(세종 5) 문과,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에 차례로 급제하였다.

1427년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1428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1442년(세종 24) 전라도 관찰사, 1451년(문종 1) 경기도 관찰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공조 참판이 되었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병조 참판·호조 참판·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단종이 신하들에게 대사헌(大司憲)을 맡길 만한 인물을 물었고,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이 박중림을 추천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치고 왕위를 찬탈하자 박중림은 관직을 그만 두었다. 세조가 박중림을 위무하기 위해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큰아들 박팽년을 비롯하여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중림은 아들 박팽년과 함께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결국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고 그 수레들을 끌어서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인 환열형(轘裂刑)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중림의 아들 다섯 명과 손자 세 명이 모두 죽었다. 당시 손자 박순(朴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임신 중이었는데, 뱃속의 아기를 경상도 대구군 하빈현(河濱縣) 묘골[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친정에서 출산하였다.

그 소생이 박일산(朴壹珊)으로, 이후 묘골은 박중림 후손의 세거지가 되었다.

묘는 사육신 사건으로 화를 당해 실전(失傳)되었다.

1739년(영조 15) 복관되었다. 1784년(정조 8)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9)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 위치한 겸천 서원(謙川書院)과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위치한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어 있다.

1977년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육신사(六臣祠)[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경내에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육신사 경내에 충의사(忠義祠)를 건립하여 박중림의 위패를 별도로 봉안하고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문민공文愍公 한석당閒碩堂 박선생朴先生 유적비遺跡碑
제13.14.15대 국회의장 송산松山 박준규 생가터
제13.14.15대 국회의장 송산松山 박준규 생가터

달성 태고정(達城 太古亭. 보물.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번지)

태고정은 성종 10년(1479)에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건립한 정자이다. 원래는 종가 안에 붙어 있던 별당 건물이었는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 일부만 남아 있다가 이를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었다.

현재 대청에는 윤두수(尹斗壽)의 한시를 새긴 현판, 정유재란 뒤에 이곳에 온 명나라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일(一)자 형 건물로, 각각 2칸씩 대청마루와 방을 꾸몄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이 있다. 일반적으로 아궁이만 두는 정자 건물에서 부엌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태고정은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며, 조선 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인 가치가 크다(출처 : 태고정 안내판)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출처 : 문화재청)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유복자인 박일산(朴壹珊)이 1479(성종 10)에 지었던 것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일부만 남았던 것을 후손이 중건하여 1614년 공사를 마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박팽년의 절의묘(節義廟)와 99칸 종가에 딸린 별당 건물이었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治察使)로 온 윤두수(尹斗壽)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있어 임진왜란 이전, 멀리는 성종조인 1470-1594년간의 건축이라 추측된다.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부른다. 왼쪽 끝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뒤쪽에 같은 크기의 부엌을 마련하고 그 오른쪽 2칸에 대청을 둔 단순한 평면 구성을 이룬다.

막돌 허튼층쌓기로 된 높이 0.9cm 정도의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큰 초석을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워 창방(昌枋)으로 기둥머리를 결구하였다.

기둥머리에는 굽면이 비스듬히 끊기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柱頭)를 얹고, 기둥머리에서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하나 대어 대들보 머리를 받쳐 조선 시대 전기의 건실한 초익공계(初翼工系)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주에는 익공이 없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걸고, 기둥머리에서 운형초각(雲形草刻)이 된 보아지를 내어 들보를 받치고 있고, 첨차로 짠 동자주(童子柱)를 대들보 위에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고 있다.

온돌방 쪽 중앙에서는 기둥 역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에 주두(柱頭)를 얹고 양쪽으로 첨차를 빼서 벽 상부로 가로지른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종보 위에는 판대공에 첨차를 두어 종도리(宗道里)를 받치고 있으며, 측면 가운데 기둥머리에서 아름다운 우미량(牛尾樑)을 내어 대들보 위에 걸고 있다.

대청 장귀틀[長耳機]과 동귀틀로 짜고 마루널을 끼운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椽背天障]이나 합각머리 부분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대청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며 측면과 배면에는 본래 골판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대청 전면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평난간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온돌방 쪽으로 부섭지붕을 덧붙여 온돌방 쪽의 박공지붕과 잇대었으며, 대청쪽은 홑처마로 하였다.

이 건물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가구(架溝)나 세부 가공이 정교할 뿐 아니라 초익공계의 정교한 구성을 보이고 있어 사적 가치가 있다.

태고정 뒤편에는 사육신을 배향한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4년-1975년에 걸쳐서 옛 터에 다시 지었다. 정면 5칸 다포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경북대 박물관, 1980, 《경북 달성 문화 유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지붕은 온돌방 쪽으로 부섭지붕을 덧붙여 온돌방 쪽의 박공지붕과 잇대었으며, 대청쪽은 홑처마로 하였다.
대청에는 윤두수(尹斗壽)의 한시를 새긴 현판, 정유재란 뒤에 이곳에 온 명나라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다.
지붕은 온돌방 쪽으로 부섭지붕을 덧붙여 온돌방 쪽의 박공지붕과 잇대었다
안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