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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

포은 정몽주선생 고향집 터(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

노촌魯村 2022. 6. 2. 10:04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 생가 터(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 문충골)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포은선생 생가는 소려말 삭거리索居里, 사거리士居里로 불려지다 1401년 태종원년에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으로 하사 받은 후 1430년경 세종 당시 포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후세들에게 전하고자 마을 지명을 문충동文忠洞, 본가가 위치한 골자기를 문충곡文忠谷(문충골)이라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오천 문충리에는 100여 년 전부터 “자고로 유명한 우리 문충동, 정포은 나신 곳이, 이곳이 로다. 산수도 가려하고 인심 좋으나, 아이들 교육 없어 유감이로다.” 라는 문충 동가(洞歌)가 마을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온다.

 

문충1리 마을회관
문충리 어르신께서  '문충골에 대한 안내'를 하셨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고려의 문신, 학자, 호號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으로서 소려 충숙왕 복위 6년에 오천읍(당시는 영일현) 문충동에서 태어나 구정리에 기거하다가 유년기에 외기인 영천에 이거하였다.

습명襲明의 10대손으로 사람됨이 호매하게 뛰어나고, 충효의 대절이 있었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는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얻은 바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3576년(공민왕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9)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362년 예문관의 검열. 수찬이 되었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1410년(태종원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 봉되었으며,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주었다. 태종은 또 찬시讚詩에서 “반듯이 고려의 충신은 오직 포은공圃隱公 이 분 뿐이네” (須識高麗一介臣수식고려일개신)라고 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천품이 높고 호매하여 충효를 겸하였다. 그의 시문은 호방·준결하며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諸城驛夜雨(제성역야우) : 제성역의 밤비

 

今夜諸城驛(금야제성역)

오늘밤 저성역에 머무르면서

胡爲思舊居(호위사구거)

고향생각 왜 나는지

遠遊春盡後(원유춘진후)

봄 다간뒤 멀리와서

獨卧雨來初(독와우래초)

첫 비올 때 홀로 누웠네.

永野田宜稻(영야전의도)

영천 들판 논에는 벼가 잘되고

烏川食有魚(오천식유어)

오천에는 먹을만한 고기가 있어

我能兼二者(아능겸이자)

나에게 두가지 모두 있건만,

但未賦歸歟(단미부귀여)

돌아가는 글을 짓지 못하는구나

  

* 포은 정몽주 선생은 영일이 본향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쓴 저성역야우(諸城驛夜雨)라는 시에서도 오천이 고향이라고 하였다.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 문충골
문충리 어르신께서  '문충골 포은선생 승마암' 대한 설명을 상세히 하셨다.(아래 부분은 흙에 묻히고 윗부분 만 보인다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