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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

보경사寶鏡寺

노촌魯村 2022. 1. 23. 09:14

보경사寶鏡寺(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중산리 622)) 유래

보경사는 602년(신라 진평왕 24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 지명법사가 603년(진평왕 25년)에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지명법사는 진나라(중국 낙양)에서 유학하면서 ‘백마사’에서 모셔온 팔면보경八面寶鏡에 대한 이야기를 왕에게 자세히 고하고 큰 불사를 원력을 밝혔다.

왕은 지명법사10만리 만경창파를 헤치고 모셔온 호법인연으로 대작불사 의지를 삼보전에 아뢰고 신하들을 대동해 해맞이(영일) 고을로 출발하였다.

일행이 명당을 찾고 있을 때 지명智明법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오색구름이 있었는데 이 구름을 따라 동해안을 거슬러 내연산內延山에 도착했다.

일만이천봉에 12폭포가 절정을 이루고 넓은 연못이 있었다.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8면보경을 봉안한 후 대가람을 완성했는데 이 절이 보경사이다.(출처 : 보경사)

    

천왕문天王門

이 건물은 보경사 경내를 수호하는 수문장격인 사천왕四天王을 봉안한 곳이다.

사천왕이란 동서남북의 지국천왕持國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이 사천왕는 인간들이 착한 일을 하면 즐거움을 주고 악한 일을 하면 고통을 주는 선신으로서 불법을 옹호하고 정도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호한다.

이 건물은 의민스님의 ‘천왕문중창상량문(1761년)’ 이종영 ‘보경사사천왕중건기(1767년)’에 의하면 사천왕문은 1686-1688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날고 좁아서 1726-1732년에 공사하여 1761년에 중건공사를 완공하였다.

육철, 승언 두 스님이 중건공사를 주간하였고, 한규 스님이 협력하였으며, 현진 스님은 옛 사천왕상을 옮겨 모셨다.

현재의 사천왕상은 1979년 새로 봉안한 것으로서 부산시 무형문화재 목조각장인 청원스님께서 조성하였다.(출처 : 보경사)

      

전면 중심칸에는 사자를 조각한 신방목이 결구되어 있는데 보통 둥글게 만들어 태극문양 등을 새기는데 비해 사자상의 조각이 정교하고 국내의 사례가 적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포항보경사오층석탑(浦項寶鏡寺五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보경사 경내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약간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일명 ‘금당탑(金堂塔)’이라고도 부르는데,『보경사금당탑기(寶鏡寺金堂塔記)』에는,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이 고려 현종 14년(1023) 3월에 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포항 보경사 적광전(浦項 寶鏡寺 寂光殿. 보물.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보경로 523 (송라면))

보경사는 신라 25년(602)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 지명(智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보경사에 위치한 적광전은 사명대사가 1588년에 지은 <내연산보경사금당탑기(內延山寶鏡寺金堂塔記)> 에 의하면 603년(신라 진평왕 25)에 창건된 뒤 1214년(고려 고종 원년)에 원진국사가 중창하고, 1677년(숙종 3)에 삼창한 불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불교전래 역사를 볼 때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평면에 다포 맞배지붕이며,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다. 주초는 주좌와 고맥이가 뚜렷한 통일신라기 초석이고 고맥이도 돌로 만든 전형적 통일신라기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법들이며 전면에 심방석 부재도 남아있어 신라시대 고부재(古部材)을 사용하여 중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 중심칸에는 사자를 조각한 신방목이 결구되어 있는데 보통 둥글게 만들어 태극문양 등을 새기는데 비해 사자상의 조각이 정교하고 국내의 사례가 적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공포는 다포계열로 정면과 배면은 주간포를 2구씩, 양측면은 1구씩 설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맞배지붕 다포건축물에서 측면에 포작을 설치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나 적광전은 다소 예외적이다.

내외 출목 수가 같은 특징이 있으며 공포의 세부 형식에서 17세기기 말 다포계 공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포계인데도 우물반자를 설치하지 않고 가구를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장으로 처리한 것도 또한 특징적이다.

위 내용으로 살펴 볼 때 적광전은 구조적으로나 의장적으로 매우 독특할 뿐만 아니라 조선중기의 특징적인 건축수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출처 : 문화재청)

      

전면 중심칸에는 사자를 조각한 신방목이 결구되어 있는데 보통 둥글게 만들어 태극문양 등을 새기는데 비해 사자상의 조각이 정교하고 국내의 사례가 적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포항 보경사 비로자나불도(浦項 寶鏡寺 毘盧遮那佛圖. 보물.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보경로 523 (송라면, 보경사))

‘포항 보경사 비로자나불도’는 1742년(영조 18) 뇌현(雷現), 밀기(密機), 석잠(碩岑) 등 조선 후기 경북지역에서 활동한 세 명의 불화승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린 작품이다.

높이와 좌우 폭 모두 3미터에 가까운 대형 삼베 바탕에 붉은 안료를 칠한 뒤 인물과 의복 등을 백색 안료로 그린 선묘불화(線描佛畫)이다.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금니선묘불화는 고려 후기에 등장했으나, 삼베에 그린 선묘불화는 조선 16세기에 이르러서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왕실의 금선묘(金線描) 불화에 비해 민중불화의 일종인 삼베 바탕 선묘불화는 18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제작되었으며, 그중 ‘포항 보경사 비로자나불도’가 대표적 작품이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문수․보현보살과 사천왕상 등 권속(眷屬)들이 둥글게 에워싼 원형 구도로서, 이렇듯 비로자나불을 주존불(主尊佛)로 배치한 불화 중에는 이 작품이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붉은 바탕과 백색의 선묘, 섬세한 필선과 적재적소에 배치된 장식 문양 등이 어우러져 시각적인 오묘함과 조화로움이 돋보이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뚜렷하여 조선 후기 비로자나불 도상 및 선묘불화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주초는 주좌와 고맥이가 뚜렷한 통일신라기 초석이고 고맥이도 돌로 만든 전형적 통일신라기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법들이며 전면에 심방석 부재도 남아있어 신라시대 고부재(古部材)을 사용하여 중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숙종 3년에 새로 지었고 그 후 몇 차례 보수하였으며 ‘보경사사적기’에 의하면 1677-1695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고 1677년에 대웅전이 삼존불이 봉안되었다고 한다. 적광전후불도목판벽의 뒷면에 남아 있는 묵서명에는 대웅전의 해체공사를 1743년6월3일에 시작하여 6월21일에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1932년에 대대적인 중수에 의한 양식적 특징이 주로 남아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앞의 칸은 통칸으로 처리하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을 3단으로 쌓고 가장자리로 덮개돌을 들렀으며, 위쪽 면은 1978년에 벽돌을 깔아 고친 것이다.

부처를 모신 불단은 고주에 의지하여 설치하고 삼존불상을 모셨으며 상부에는 낙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보개를 설치하였다.(출처 : 보경사)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세존의 일대 생애를 시기적으로 여덟 가지로 나누어 팔폭 화면으로 그려 모신 전각이다.

이 팔상전에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주존으로 모시고 왼쪽에는 미륵보살 오른쪽에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을 모시고 양 주변에 팔상탱화를 배열하였다.

이 전각은 조선 숙종 3년(1678년) 지총스님이 화주하여 세웠다.(출처 : 보경사)

*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은 석가모니 전생에 수기를 준 부처로 연등불(Dipamkara), 정광불이라고한다. 제화갈라는 산스크리스트 이름을 음역한 것이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를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산령각山靈閣

산령각은 내연산 산신과 시방법계의 산신을 봉안한 전각인데 보경사 경내를 수호하고 불법과 선행을 행하는 사람을 수호하는 선신이다.

이 전각은 원래 여기서 북쪽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산록에 있던 것을 1914년에 현 장소로 이건하였다.(출처 : 보경사)

        

원진각圓眞閣

이 전각은 보경사 창건주 지명법사의 영탱影幁과 원진국사의 등상을 모시고 그 밖에 서산 사명대사와 보경사에서 수도와 교화를 하시다가 입적하신 대덕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이 전각의 건립은 조선 숙종 3년에 학열스님이 화주하여 세웠다.(출처 : 보경사)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석가세존이 생존해 계실 때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많이 하셨는데 이를 약하여 영산靈山이라고도 한다.

이 영산전에는 가운데 석가세존, 좌우에 사지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모시고 그 좌우에 16아라한十六阿羅漢을 배열하였다. 일명 십육나한전十六羅漢殿이러고도 한다.

* 아라한阿羅漢 : 소승 불교에서, 불제자 중에 번뇌를 끊어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춘 사람을 이르는 말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음 생을 받기 전에 이 세상에 있을 때 선악간의 행위를 심판받아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데 그 심판하는 관부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중앙에 지장보살 地藏菩薩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그리고 그 좌우로 시왕(십대왕)을 모신 전각이다.

일명 시왕전 혹은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 3년(1678년)에 건립하였다,(출처 : 보경사)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浦項 寶鏡寺 圓眞國師碑. 보물.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 보경사 (중산리))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출처 : 문화재청)

 

비는 이수가 없고 신석양각(身石兩角)을 귀접이한 독특한 형식으로 귀부와 대석은 단일석이며 비 좌는 폭이 배면과 거의 같은 정도의 넓이로 주위에 단판(單瓣) 44연 판(蓮瓣)을 조각하였고 귀두(龜頭)는 여의주를 머금은 용형화(龍形 化)하였으며 양각을 귀접이 한 신석 둘레에는 넓이 7.4cm의 당초문 대를 조식하였다. 귀부(龜趺)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사암(砂岩)으로 되어 있는데 비신높이 1.83m, 폭 1.04m , 두께 17cm이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다.

 

포항 보경사 승탑(浦項 寶鏡寺 僧塔. 보물.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33, 보경사 (중산리))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 서 있는 묘탑으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원진국사 신승형(申承逈)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51세에 입적하자 고종이 그를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기단부(基壇部)의 아래·중간·윗받침돌 가운데 3단으로 이루어진 8각 아래받침돌은 맨윗단에 연꽃조각이 둘러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겨두었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의 끝이 뾰족하고 중앙의 세로선이 볼록하게 돌출되어 당시로서는 드문 모습이다.

탑신(塔身)은 몸돌이 매우 높아 마치 돌기둥처럼 보이며, 앞면과 뒷면에 자물쇠모양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모서리에서 뻗어나가는 곡선의 끝마다 꽃장식이 조그맣게 솟아있다. 처마의 곡선은 양쪽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고, 추녀는 두터워 보인다.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활짝 핀 연꽃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을 올리고, 연꽃조각이 새겨진 돌을 놓은 다음,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어서 마무리 하였는데 보존이 잘 되어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나, 몸돌이 지나치게 길어 전체가 길쭉해 보이며 너비도 좁아 안정감이 적다. 각 부분의 조각에도 생략이 많아 단순한 감이 들고 밋밋하다.(출처 : 문화재청)

            

탑신(塔身)은 몸돌이 매우 높아 마치 돌기둥처럼 보이며, 앞면과 뒷면에 자물쇠모양을 새겨놓았다.

         

포항 보경사 괘불탱(浦項 寶鏡寺 掛佛幀. 보물.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보경로 523 (송라면, 보경사))

보경사 괘불탱은 1708년(숙종 34)에 조성되었지만, 17년 뒤인 1725년(영조 원년)에 중수하였다. 화원은 의균(義均)·석민(碩敏)·성익(性益)·지붕(智朋)·체환(體環)·쾌민(快敏)·삼학(三學)인데, 모두 대구 팔공산 동화사와 파계사의 불화 조성에 참여한 화사로 주로 경상도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 괘불탱은 10m에 이르는 대형의 화면에 연꽃줄기를 든 보살형의 여래만을 단독으로 그렸는데, 의균의 작품 중에서 최대의 역작이다.

대형의 화폭에 단독의 존상만을 그린 구성은 매우 단순하지만 홍색과 녹색, 청색계열의 색만을 이용해 조화와 대비를 훌륭하게 처리하였고, 여래가 입고 있는 가사의 조(條)에 금 바탕에 녹색으로 문양을 내는 장식이나 끝단의 세부 문양 등 세부장식에도 소홀함이 없다.

보경사 괘불탱같이 5여래가 표현된 화려한 보관과 연꽃을 들고 있는 괘불도상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 경상도지역에서 유행한 괘불형식으로 괘불 도상의 계승을 연구하는 데 의미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사인비구 제작 동종 -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 (思印比丘 製作 銅鍾 - 浦項 寶鏡寺 瑞雲庵 銅鍾. 보물.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 (중산리))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지닌 형태를 합해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중에서 가장 시기가 앞선 것으로, 꼭대기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둥근 고리가 있다. 어깨 부분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40개의 연꽃잎을 세워 두어 넓은 띠를 형성하였다.

이 띠 아래로는 일반적으로 9개의 돌기가 있는 것에 반해 5개의 돌기를 가지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연곽이 4곳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부처의 말씀인 진언(眞言)을 새긴 점이 이 종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범종의 특징을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조선 후기 종과 장인사회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포항 보경사 탱자나무(포항 寶鏡寺 탱자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 (중산리))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보경사의 탱자나무는 보경사 경내 천왕문 우측 동편 종무소를 사이에 두고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대웅전 쪽의 나무는 지상 160㎝ 위치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원형으로 왕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맞은편의 나무는 지상 40㎝ 위치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자라고 있다.

그러나 경내 2그루의 탱자나무 중 태풍 ‘나비’로 고사한 동쪽 탱자나무는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하였으므로 2006.01.08. 기념물에서 해제하고 서쪽의 탱자나무의 종자로써 후계목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나무는 탱자나무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것으로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