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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25 및 월남참전 유공자 기념비. 공산면 미대동 만세운동. 현양비(顯揚碑)

노촌魯村 2022. 10. 27. 03:38

6.25 및 월남참전 유공자 기념비

6.25 및 월남참전 유공자 기념비

공산면 미대동 만세운동

[마을 전체가 만세운동을 일으키다. 공산면 미대동 만세운동]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는 인천채씨들이 오래전부터 동족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채학기(蔡鶴基)는 채갑원이 가지고 온 3월에 대구 서문 밖 만세시위운동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보고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 뒤 채학기는 「독립선언서」와 자신이 지향하는 바의 독립에 관한 내용을 격문으로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채봉식(蔡奉植)·채희각(蔡熙覺)·채갑원(蔡甲元) 등이 만세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함께 모았다.

  그들은 만세독립시위에 대한 방법을 모의한 끝에 운동 날짜를 1919년 4월 26일 늦은 시간으로 잡고, 장소는 자신들이 사는 미대동의 여봉산(礪峯山)으로 정했다.

  앞의 날짜와 장소에서 독립만세를 목청껏 소리 높여 외쳤다.

  독립만세의 함성은 잠자는 이곳 민중들을 일깨워 주었다. 이틀 뒤인 1919년 4월 28일 이들 네 명은 같은 집안의 채경식(蔡敬植)·채명원(蔡命元)·채송대(蔡松大)·채재갑(蔡再甲) 등과 더불어 다시 여봉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 독립만세시위는 동족부락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채학기를 비롯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팔공주재소(八公駐在所)의 일본경찰에게 검거되어 대구에 위치한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채학기는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으면서도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 삼천리 강토를 약탈해 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즉시 철폐하라”, “조선인도 자주력이 있다.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는 주장을 펼쳤다.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7호」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에서 8개월까지의 실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들의 연령은 모두 10대에서 20세에 걸친 청년층이었고, 직업은 모두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현양비(顯揚碑)

이영李榮  :  조선전기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출신 청백리로 이름난 무신.

  이영(李榮)의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당(掛鞭堂), 본관은 영천이다. 아버지는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이순손(李順孫)이고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월성최씨(月城崔氏) 참군(參軍) 최한(崔瀚)의 딸이다.

    이영은 1514년(중종 9) 21세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1545년(인종 1) 정평부사로 치적(治績)이 크게 드러나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551년(명종 6)에 가선대부에 올라 회령부사가 되었는데 치성(治聲)이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청렴한 관리 43인을 선발하였는데 이영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553년(명종 8)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듬해인 1554년(명종 9)에 북병사(北兵使)로 여진족을 잘 다스렸다.

  1555년(명종 10)에 병조참판으로 내직으로 들어올 때 명종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어 행장(行裝)을 점검하게 하였는데 다만 헤진 이불 한 채만 있을 뿐이었다. 임금께서 “그대의 청백(淸白)은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도다”라고 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제주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공평하게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돌아올 때 손에 있던 편[鞭: 말채찍] 하나도 관(官)의 물건이라 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두고 돌아왔다. 이로써 괘편당(掛鞭堂)이라는 호(號)를 얻게 되었다.

  이영이 남긴 「병중에 느낌이 있어[병중유감(病中有感)]」, 「타계한 유절도사를 애도함[만유절도(挽柳節度)]」, 「타계한 부인 송씨를 슬퍼함[만부인송씨(挽夫人宋氏)]」 시 3수가 『괘편당실기(掛鞭堂實紀)』에 수록되어 있다. 이영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內洞)에 있다.

  이영은 1729년(영조 5)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청백사에 제향되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앞 동산에 2010년 건립된 현양비(顯揚碑)가 있다.(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