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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노촌魯村 2023. 3. 6. 12:48

2023.3.2 촬영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 (부여읍,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 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 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 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출처:문화재청)

정림사지 5층석탑의 건립연대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구조

여러장의 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귀퉁이 기둥돌)와 탱주(지탱하는 돌)를 하나씩 세웠습니다. 1창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돌로 민흘림의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장씩 판석을 끼웠다. 탑신 2층부터 몸돌은 윗면으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는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든다.
옥개석(지붕석)은 얇고 넓으며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고, 옥개받침(지붕받침)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히 다듬어서 간략화된 공포(公布) 형태를 재현하였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한 단의 탑신받침을 놓았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석을 두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고 축조하여 외견상 목조건물과 유사하다. 안정감 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탑이다.(출처:정림사지박물관)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이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다.(출처:정림사지박물관)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탁본
정림사지오층석탑 건축(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정림사지오층석탑 건축(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정림사지오층석탑 건축(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정림사지박물관의 정림사지 오층삭탑 모형
'태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문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를 새긴 기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