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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백제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 및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노촌魯村 2023. 3. 5. 19:42

백제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 국보.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국립부여박물관))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아래의 몸체는 하나하나의 연잎의 표면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 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며 세부의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백제시대의 창의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당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공예기술 및 미술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이다.(출처: 문화재청)

발굴 과정 : 백제금동대향로는 원래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건설하던 곳에서 발견되었다.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시점에 물웅이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견 당시 백제금동대향로는 진흙 속에 있었고, 바닥에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이 발굴되었는데, 발굴단은 이 섬유 조각이 백제금동대향로를 감쌌던 것으로 추정했다. 또, 대향로가 오랜 세월에도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로 진흙에 잠긴 진공 상태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1]
1995년의 발굴 조사로 대향로가 발견된 일대가 백제 시대 왕실 절터였음이 입증되었다. 발굴된 목탑 흔적에서 발견된 사리감에서 "백제 창왕 13년 (567년)에 정해공주가 이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학계는 이 점에 주목하여 대향로가 단순한 향로가 아니라 의식용이나 제사용으로 사용된 신물로 추정하고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국보.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이 훼손된 상태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터널형으로 높이 74㎝, 가로·세로 50㎝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었으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턱이 마련되어 있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출처 : 문화재청)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석조사리감앞면명문의탁본

[2] 구성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2.5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잇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뉘,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 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가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각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3]금동대향로의 세계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백제의 것과 같은 대형 향로가 없으며, 한나라 때와 같은 금동 제품이 남조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남조시대 유물들 중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백제의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것이 확인되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

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설도 있다.(지역정보포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