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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선암사 각황전(仙岩寺覺皇殿) 및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仙巖寺覺皇殿鐵造如來坐像)

노촌魯村 2023. 4. 5. 07:50

선암사 각황전(仙岩寺覺皇殿.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죽학리 802))

선암사 경내에 있는 조선 후기 불전. 선암사각황전은 순천 선암사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있다.

순천 선암사 경내 북쪽 끝에 있는 무우전 안쪽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소규모 불전이 선암사각황전이다.

선암사각황전은 861년(신라 경덕왕 원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이곳에 터를 잡고 초창했다는 전설이 있는 건물로 1092년(고려 선종 9)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60년(현종 원년)에 문정 등 3대사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으며 1760년(영조 36)에 상월, 서악 두 명의 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선암사각황전을 1991년 7월 해체 복원 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현존하는 선암사각황전은 1800년(순조 1)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선보(善報)를 위하여 선암사각황전을 건립하고 철불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선암사각황전의 좌향은 남향이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은 전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외벌대로 되어있고 초석은 장대한 자연석으로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낮은 기둥 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얹은 후 공포를 올려서 건물의 높이를 한층 더 높게 하였으며 창방(昌枋)[한식 나무 구조 건물의 기둥 위에 건너질러 장여나 소로, 화반을 받는 가로재]과 평방머리는 모두 직절하여 단순하게 처리했다.

포작은 다포형식으로 외2출목으로 하고, 내부는 출목이 없이 첨차에 연결된 가늘고 긴 부재로 층을 쌓아 올렸다. 내부가구 구조는 목탑에서 주로 나타나는 무량구조로서 천장에 우물반자가 짜여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겹처마로 되어있으며, 창호는 정면에 쌍여닫이문과 좌측에 외여닫이문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암사 각황전(仙岩寺覺皇殿.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죽학리 802))

선암사는 지었을 당시의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고, 고려 선종 6년(1088)에 의천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으로 통일신라 경문왕 원년(861)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종 1년(1660)에 복원하였고, 다시 영조 36년(1760)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각황전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규모는 작으나 화려한 멋을 지닌 건물이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민 천장을 설치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仙巖寺覺皇殿鐵造如來坐像)

선암사 각황전에 봉안된 고려 초기 불상. 순천 선암사의 경내 북쪽에 무우전(無憂殿)이 있고 바로 뒤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소규모 불전인 선암사각황전이 있다.

선암사각황전의 주불로 봉안한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은 정유재란 때 큰 손실을 입어서 보수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통영의 신도들이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 위에 한지를 바르고 호분을 칠하였다고 한다.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은 그 후 1991년 한지와 삼베를 뜯어내고 점토 위에 개금하여 현재에 이른다.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 상호는 크게 손상을 입어서 근래에 와서 보수하여 원형을 잃고 있다.

얼굴의 전체 형태는 역삼각형에 가깝고, 보림사 철불처럼 눈두덩이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머리에는 널찍한 반달 모양의 계주가 있고, 머리 꼭대기에는 원통형의 정상 계주가 있어 특이하다. 이러한 정상 계주는 주로 조선시대의 불상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이어서 보수 시 만들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법의는 인도 간다라 불상 양식처럼 우견편단[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되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는 형식]인데, 왼쪽 목 부위에서 오른쪽 가슴으로 뻗어 내린 옷 주름은 거의 사선에 가깝고 끝단은 띠를 이루고 있다.

무릎 위에는 옷 주름이 높게 솟아 있고 발목 부위에는 희미하게나마 번파식의 의문이 보인다. 양 무릎 사이에는 석굴암 본존불상의 의문처럼 부채를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양 어깨선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었으며 젖가슴은 약간 돋아나 볼륨이 있고 무릎은 높게 만들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양]으로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은 곧게 펴서 무릎에 대었으며 왼손은 복부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양손은 나무로 만들어 팔목 안으로 끼워 넣었다.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은 약사불로 구전되어 오고 있으나 약사불보다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으로 보아 오히려 석가여래일 가능성이 크다.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은 손상이 많이 되었고, 조성기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조성 시기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은 두툼한 눈두덩이, 볼륨 있는 가슴, 양 무릎을 사이에 퍼진 부채꼴 모양의 대칭의문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양식 일부를 느낄 수 있으며,

두터운 우견편단의 사선이나 높고 너비가 넓은 무릎, 턱이 뾰족하고 풍만감이 상실된 상호 등으로 볼 때 고려 전기의 양식도 보여 조성 시기는 고려 초기로 생각된다.

선암사 각황전 철조여래좌상은 고려 초기 순천 지역에 선종이 전파되었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고려 초기 철불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