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북

보은 속리산사실기비(報恩 俗離山事實記碑).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

노촌魯村 2023. 5. 8. 06:25

보은 속리산사실기비(報恩 俗離山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번지)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는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이 쓴 것이다.

비문에는 속리산이 명산이라는 것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 속리산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이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고 한다. 이를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국(東國, 한국) 명산에 큰 거북의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재물을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 속리산 수정봉에 있는 돌거북의 목을 자르고, 돌거북의 등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고 한다.(출처 : 문화재청)

 

1989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163㎝, 너비 65㎝. 속리산의 내력과 관련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법주사수정교 앞의 보호각 안에 있다. 1665년(현종 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과 수정봉(水晶峰) 위의 거북바위에 대한 속설(俗說)을 소개하면서 미신의 타파를 주장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정봉은 법주사 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그 정상의 흙이 붉은데, 그 까닭은 본래 수정봉 위에는 천연적으로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중국의 술객(術客)이 와서 거북의 머리가 중국이 있는 서쪽을 향하여 번쩍 쳐들려 있는 형상임을 보고, 중국의 재화(財貨)를 모두 실어내갈 영물(靈物)이라고 하면서,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뜨리고 등 위에 10층탑을 세워 기운을 진압했다.

그 때 거북이 흘린 피 때문에 흙이 붉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1653년(효종 4) 옥천군수 이두량(李斗梁)은 다시 거북의 머리를 붙이고, 1665년 충청병사 민진익(閔震益)은 탑을 부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미신적 행위로 경계한 내용이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번지)

법주사의 절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다.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출처 : 문화재청)

 

1664년(현종 5)에 건립되었고 비신의 높이 214㎝, 너비 108㎝, 두께 35㎝이며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금강문(金剛門) 앞에 위치하는데, 커다란 반석(盤石)에 홈을 파고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우진각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었다.

비문은 대사의 제자 처능(處能)의 부탁으로 동부승지 정두경(鄭斗卿)이 지었고, 글씨는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썼으며,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는 대사의 용맹을 보여주는 일화, 스승 부휴(浮休)와 함께 왕에게 친국(親鞠) 받았을 때의 일화, 인조 때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 되어 승도를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조한 일, 병자호란 때 삼천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관군과 함께 싸운 일, 왕자였던 효종을 만나 화엄(華嚴)을 논했던 일, 입적(入寂)할 때의 일화 및 대사의 인품에 대해 적혀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