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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벽화 이야기

노촌魯村 2023. 8. 6. 21:51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용연사 극락전(龍淵寺極樂殿.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용연사길 260 (옥포읍, 용연사))

  비슬산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1년(1419)에 천일대사가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200여 칸이 넘고 승려도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극락전 향向 우측 외벽 벽화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팔을 잘라 도를 구하다)

  중국 당대에 형성된 선종은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 즉 불성(佛性)을 자각하고 그 지혜와 덕성을 일상 속에서 완성하고 전개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장 본질 적인 가르침이 선(禪)수행이라고 여겼기에 이 전승의 출발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첫번째 조사는 가섭 존자이며 두 번째는 아난 존자이다. 이후 27조 반야다라 존자를 잇는 28조가 바로 달마(達磨) 대사이다.

  남인도 향지국의 태자였던 달마 대사는 인도 28조이면서 중국 초조(初祖)가 된다. 그로부터 2조 혜가(慧可) 대사, 3조 승찬(僧璨) 대사, 4조 도신(道信) 대사, 5조 홍인(弘忍) 대사에 이르렀고, 홍인에게서 6조인 혜능(慧能) 대사가 나왔다.

  그래서 서천(西天) 28조와 동토(東土) 6조를 합쳐 33조사를 헤아리고, 이를 지혜의 등불을 잇는 전등(傳燈)의 정통으로 삼는 전통이 생겨났다.

  달마 대사는 스승이던 반야다라 존자의 열반을 마지막으로 인도 내의 교화를 제자들에게 맡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양(梁)나라의 왕이던 무제(武帝)를 만났으나 무제는 대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대사는 그 길로 낙양(洛陽)의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면벽(面壁)하며 시절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렸다.

  대사의 말없는 교화가 9년째이던 어느 해 엄동설한에 유불선(儒佛仙)의 이치를 통달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면벽한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신광은 춥고 눈내리는 긴 겨울밤을 인내로 지새웠다.  

  대사가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큰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며 꾸짖자 신광은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잘라 구도 결심의 척도를 보였다. 이에 땅에서 파초잎이 솟아나 팔을 받쳤고 대사는 신광의 입문(入門)을 허락하여 혜가(慧可 487-593)라 하였다. 혜가는 달마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단비도는 벽화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회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내용을 사실적이고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글· 최성규 / 사단법인 한국전통불교회 불화연구소 소장)

지리산(智異山) 칠불사(七佛寺) 아자방(亞字房) 불교설화

  조선 중엽 하동 군수로 온 정여상이 쌍계사에 초도순시차 왔다. 쌍계사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 주지스님이 내어 온 녹차를 마시고는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칠불암의 아자방 얘기가 나왔다. 정여상은 쌍계사 주지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칠불암이라는 암자가 있지요? 좀 보고 싶은데요. 참 어째서 칠불암이란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까?”

  “예, 그 칠불암은 신라 제5대 바사왕 23년(서기 102년),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출가하여 그곳에서 모두 성불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제가 듣기로는 그 암자에 아자방이 유명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좀 유명하지요.”

  “어떻게 유명합니까?”

  “예, 그 아자방은 방 자체도 크지만 방의 형상이 아자형식으로 되어 있어 아자방이라 합니다. 높이가 12자인데 높은데도 참선하는 스님네가 있고, 낮은 데도 참선하는 스님네가 앉아 정진하지요. 불을 때면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함께 더우며, 한 번 방이 덥혀지면 석 달 열흘 동안 불을 때지 않더라도 방안이 훈훈하다고 합니다.”

  정여상은 내심 놀랐다.

  “허, 그렇군요. 이거 호기심이 나는데요.”

  쌍계사 주지는 군수 정여상이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나서 말했다.

  “설계는 신라 효공왕 때(897–912 재위)가 담공선사가 했지요. 참 특이한 온돌식 난방구조입니다. 동양에서는 유일한 대선방이며, 오직 우리 조선에만 있는 유일한 난방구조입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습니까?”

  “웬걸요. 거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참선수도하는 스님네만 입방이 허락됩니다.”

  “제가 좀 보려고 하는데 안내해 주시겠소?”

  “좀 곤란합니다. 그 아자방은 오로지 참선하는 방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쌍계사는 물론 조선의 모든 사찰들이 아자방만큼은 잘 수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곤란합니다.”

  “그래도 스님이 안내를 좀 하시오.”

  하동 군수 정여상은 자신의 권력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스님네는 바로 그 점이 아니꼬웠다. 하지만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대답했다.

  “말은 유명하다고 했으나 볼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지요.”

  정여상의 낯빛이 약간 변했다.

  “나는 이 고을 군수요. 군수가 안내 좀 해 달라는데 그렇게 뻐길 것까지는 없지 않소. 어서 안내하시오.”

  스님네는 군수 정여상을 칠불암으로 안내했다. 정여상의 표정에는 거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까짓 중들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는 식이었다. 그는 약간의 승리감에 들떠 말했다.

  “내 여기까지 왔다가 그 유명하다는 칠불암과 아자방을 보지 않고 간대서야 말이 되는가, 어험.”

  칠불암에 도착한 군수 정여상 일행은 법당 안에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기웃하며 다녔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별로 볼 것도 없구먼. 괜스레 야단들이로고.”

  군수가 아자방 앞에 이르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이 방이 그 유명하다는 아자방이오?”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문을 여시오.”

  “안 됩니다. 지금은 정진중이라 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가능하겠소?”

  “예, 이제 막 점심 공양을 끝내고 정진에 들어갔으니 적어도 서너 시간은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참으로 무례한 사람들이로고.”

  정여상은 눈을 치켜떴다. 당장이라도 스님네를 징치懲治(사람을 징계하여 다스림)하려는 듯싶었다. 스님네는 하동 군수 정여상의 눈치만 살폈다. 정여상의 호령이 이어졌다.

  “어서 문을 열어 않고 뭣들 하는 게요. 내가 이 고을 성주 정여상이오. 성주가 주민을 보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정여상은 수행한 나졸들을 항해 소리 질렀다.

  “너희들이 문을 열어라.”

  그때 한 스님이 정중하게 나서며 만류하였다.

  “죄송하오나 조정의 영상대감도 그리하셨고 본도의 관찰사도 그리하셨습니다. 옛날부터 규정이 그러하오니 이 방만은 안 되옵니다.”

  정여상은 삼정도를 뽑아들며 나졸들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느냐, 빨리 문을 열어라.”

  나졸들이 달려들어 가로막고 있는 스님을 낚아채 내동댕이쳤다. 스님은 저만치 나동그라지며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나졸들은 무자비했다. 그중의 한 나졸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고, 점심 공양을 끝낸 스님들이 아자방에 들어않아 가부좌는 틀었지만 춘곤증과 식곤증이 겹쳐 모두들 졸고 있었다. 그들 자세는 엉망이었다. 어떤 납자는 천정을 쳐다보고 입을 벌린 채 졸고 있었고, 또 어떤 납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졸고 있었다. 또 어떤 납자는 방귀를 뽕뽕 뀌며 졸고 있었다. 군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껏 공부한다는 중들의 자세가 겨우 이런 것들이었냐?”

  군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언짢아했다. 그는 나졸들에게 문을 닫게 했다. 처음 문을 열었던 나졸이 문을 슬그머니 닫았다. 군수가 돌아서며 독백하듯 말했다.

  “요놈들 한번 혼쭐을 내놓아야지.”

  나졸들을 거느리고 아자방을 나서는 정여상은 심사가 뒤틀렸다.

  정여상은 고을의 동현으로 돌아왔다. 그 후 사흘이 지난 뒤 하동 군수 정여상은 쌍계사 주지 앞으로 서찰을 보냈다.

  “그대의 절에 도인이 많은 듯하오. 목마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우리 마을 고을 동헌에서 타고 한 번 놀아 봄이 어떻소. 만일 목마를 잘 타면 큰 상을 주겠소.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고을의 성주를 희롱한 죄로 엄히 다스리겠소이다.”

  군수의 서찰을 받아 본 쌍계사 대중들은 당황했다. 살아 있는 말도 타 본 사람이 없을 터인데, 불도를 닦고 참선하는 스님네가 어떻게 목마를 탈 것인가. 그렇다고 그냥 넘길 게재도 아니었다. 쌍계사 큰방에서는 각 암자의 대중들이 모여 대중공사, 즉 회의를 열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쌍계사 주지가 서두를 꺼냈다. 대중들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쌍계사 주지는 답답했다.

  “누군가 일단 말을 해 보시지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군수영감의 비위를 거스르면 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답답하니 말씀들을 해 보십시오.”

  한 스님이 말했다.

  “저희들이야 모두 초심납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이 산중에서는 쌍계사 주지스님이 가장 도가 높으시고 어른이시니, 이 일을 감당할 분은 오직 큰절 주지스님이시라 생각합니다만…”

  대중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스님 말고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군수 영감의 서찰을 받으신 분도 바로 큰절 주지스님이 아니십니까?”

  “큰절 주지스님께서 나가셔야 합니다.”

  “옳습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찬성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쌍계사 주지는 낭패였다. 동진출가(童眞出家: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하여 아직 말이라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스님들이 나서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때였다. 말석에 앉았던 열두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미가 나서더니 말했다.

  “맡겨 주신다면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스님들은 아무 걱정 마시고 싸리채를 엮어 목마를 한 마리 만들어 주십시오.”

  대중들은 어이가 없었다. 어른들도 감당할 수 없어서 쌍계사 주지에게 미루고 있는 판인데 어린 사미동자가 감당해 내겠다니.

  “자네가 무슨 재주로 그리 할꼬?”

  사미가 자신 있게 말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필코 성스러운 아자방을 환난에서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대로 어서 목마나 준비해 주십시오.”

  스님들은 하는 수 없었다. 사미의 말대로 싸리채로 목마를 만들었다. 어차피 다른 스님들도 감당치 못할 바에야 자처하고 나서는 사미에게라도 한 가락의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이다.

  사미는 절의 나무하는 일꾼인 부목에게 목마를 운반하게 했다. 하동군청 마당에는 동헌 뜰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이미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사미가 먼저 들어가 동헌 마당에 섰고 부목이 목마를 짊어져다 동헌 마당에 내려놓았다. 군수인 정여상은 사미를 보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쌍계사에는 그리도 사람이 없더냐? 저 어린 사미가 목마를 탄다고 나왔으니. 그래 사미야, 네가 정녕 목마를 탈 수 있겠느냐?”

  사미가 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쌍계사 회상에서는 소승이 가장 어리고 또한 도가 가장 낮습니다. 하오나 제가 반드시 군수님의 소원을 풀어 드리지요.”

  당당하고 막힘이 없었다. 정여상은 사미의 그 의젓함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렇다면 좋다. 네가 목마를 타기 전에 물어 볼 말이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느냐?”

  “예, 소승이 비록 저희 회상에서 가장 어리고 또한 가장 미약하옵니다만, 말씀만 하신다면 대답해 올리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허, 고놈 참 맹랑한 놈이 로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정여상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알았다. 내가 며칠 전 쌍계사 칠불암에 갔을 때 들은 말로는 아자방에는 도인들만 있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앉아 있는 모양새가 영 도인 같지 않더구나.”

  사미가 대답했다.

  “원, 군수 영감님도, 도인이라고 뭐 특별한 모습이 있겠습니까? 또 겉모양으로만 사람을 판단할 순 없겠지요.”

  “하긴 그렇기도 하구나. 그럼 내 네게 묻겠다. 하늘(천정)을 쳐다보고 졸고만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는 것이더냐.”

  “그것은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입니다.”

  “앙천성수관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네, 하늘을 보고 무량한 별들을 관하는 공부입니다.”

  “별은 왜 쳐다보고 관하는고?”

  “원, 군수 영감님은 그것도 모르십니까? 위로 천문의 이치를 통하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달해야만 천하만사를 다 알게 되고, 따라서 천상에 태어난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으음! 네 말이 그럴 듯하구나. 그럼, 머리를 숙이고 방바닥을 들여다보며 졸고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

  사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그것은 지하망령관地下亡靈觀이라는 공부법입니다.”

  “지하망령관?”

  “그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으면 지하의 지옥에 떨어져 무량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지하망령관이란 지하에 떨어져 고통 받는 중생을 어떻게 하면 제도할 수 있을까를 일심으로 관찰하고 숙련하는 공부법입니다.”

  “허, 고놈 제법이구나. 그러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전후좌우로 흔들며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하며 졸고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냐?”

  “예, 그것은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라는 공부법이지요.”

  “그것은 또 무슨 의미더냐?”

  “예, 공부하는 도승은 유에 집착해도 안 되고 무에 집착해도 안 됩니다. 고와 낙성과 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는 중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에 버드나무가 전후좌우 어느 곳으로 흔들려도 마침내 어느 한 쪽에 기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공과 유, 선과 악, 죄와 복 등 어떠한 보응에도 걸리지 않는 관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춘풍양류관의 공부법이라 합니다.”

  정여상은 사미의 대답이 이치에 딱딱 들어맞는 데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방귀를 뽕뽕 뀌어 대고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고?”

  “예, 그것은 타파칠통관打破漆桶觀이라는 공부법입니다.”

  “타파칠통관이라. 거 참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그래 그 뜻은 무엇이지?”

  *칠통(漆桶) : 옻칠을 담는 통.  어두운 중생심을 가리키는 말.

  “예, 사람이 무식하기만 하고 고집만 세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뭐든지 제 마음대로만 하려는 사또와 같은 칠통의 무리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법이지요.”

  “허허 고놈, 말버릇 한 번 고약하구나. 그래, 잘 들었다.”

  사미에게 계속해서 두들겨 맞은 군수 정여상은 앉아 있는 여러 아전과 관료들과 백성들을 돌아보며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너의 식견이 이처럼 논리 정연하고 고매하니 그곳에 있는 도승들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느냐? 이제 더 물어 볼 말이 없구나. 어서 목마나 타보도록 해라.”

  사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싸리채로 만든 목마위에 턱 걸터앉더니 고사리 같은 여린 손으로 말의 궁둥이를 후려치며 말했다.

  “어서 가자, 목마야. 미련한 우리 하동 군수 정여상 영감님의 칠통 같은 어둔 마음을 확 쓸어버리자. 그리고 그 마음에 태양처럼 밝은 부처님의 반야광명이 비치게 하자꾸나.”

  사미가 한 번 발을 구르니 싸리채로 만든 목마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보는 스님네는 마음속에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목마는 동헌 마당을 대여섯 바퀴 돌더니 둥실둥실 떠서는 공중으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군수와 육방권속들, 그리고 구경을 나온 온 고을 백성들은 너무나도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스님들은 그 사미가 다름 아닌 문수동자의 화현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사미가 목마를 타고 사라져 간 쪽의 하늘을 향해 무수히 많은 절을 올렸다. 한편 군수 정여상은 그 뒤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불심을 발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군수는 쌍계사와 아자방의 스님들을 생불처럼 공경하고 공양하였다. 이쯤 되니 육방권속들을 비롯하여 하동군민은 물론 백성들도 부처님을 신봉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교법이 널리 퍼져 마침내 화장장엄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아자방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1982년에 복원된 것이다.(글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태전선사太顚禪師와 한유韓愈 그리고 홍련紅蓮

  중국 당나라 때 한유(韓愈, 韓退之, 768~824)는 문장이 뛰어난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며, 당헌종의 신임도 두터워서 한림학사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지만, 헌종이 인도에서 부처님의 뼈사리를 모셔오는데, 크게 관심을 보여 동참하자, 그것을 비방하는 불골표(佛骨表)를 올려서 헌종의 미움을 받고, 장안에서 800리 떨어진 시골 조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술과 문장으로 세월을 보내던 한유는 조주에 훌륭한 태전선사(太顚禪師, 732~824)라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스님을 타락시켜 불교가 하찮은 것임을 밝히려고, 가장 젊고 예쁜 홍련(紅蓮)이라는 기생에게 "백일의 기한을 줄 것이니, 태전선사라는 중을 파계(破戒) 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목을 칠 것이니라."라고 했다.

  홍련은 생각하기를, “그까짓 중하나 꾀는데 뭔 100일씩이나 걸리나” 라며 우습게 생각하고는 예쁘게 단장하고 태전선사가 계시는 축륭봉으로 올라갔다. 가서는 "100일 기도를 하러 왔다"고 말씀 드리고 태전선사를 유혹하려고 했지만 100일이 다 가도록 어쩌지를 못하고 오히려 태전선사의 수행에 감화되었다.

  마지막 날이 되자 겁이 난 홍련은 태전선사에게 예절을 갖추어 삼배를 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사실은 제가 이곳의 자사인 한유의 명으로 큰스님을 타락시키고자 왔는데, 오늘까지 타락시키지 못하면 저를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큰스님, 제가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그러자 태전선사는 홍련에게 하얀 속치마를 내어 펼치라 하고는 아래의 게송(偈頌, 선시)을 써 주면서, “이곳 자사가 문장이 뛰어나다고 하니, 이 글을 보여주면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홍련은 감사한 마음으로 예를 올려 작별하고는 조주자사인 한유에게로 가서 태전선사의 게송이 적힌 치마를 펼쳐 보이니, 한유는 한 번 읽고는 감탄하면서 생각하기를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름이 헛되이 전해지지 않음)이구나. 내 친히 가서 만나봐야되겠다.”                               

십년불하축융봉(十年不下鷲融峰)

관색관공즉색공(觀色觀空卽色空)

십년 동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고

색을 관하고 공을 관하니, 색이고 공일뿐이었네.

여하조계일적수(如何曹溪一適水)

긍타홍련일엽중(肯墮紅蓮一葉中)

어찌 조계의 한 방울 물을

홍련의 한 잎사귀에 떨어뜨리겠는가.

한유가 태전선사에게 가니, 선사가 묻기를 “어떠한 불교경전을 읽어보았습니까?” “뭐 특별히 읽어 본 경전이 없습니다.” 그러자 태전선사는 “문장(학문)으로 이름 높은 자사께서 어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불교를 비난하셨습니까?” 그래서 한유는 자신의 잘못됨을 뉘우치고 태전선사에게 귀의하고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에 관한 문장도 많이 썼다고 한다.(출처 : 허공. 허공처럼 살자)

설산동자와 나찰

  대반열반경에 등장하는 설산동자 반게살신(雪山童子 半偈殺身) 대목

  싯다르타의 전생에 설산동자라는 이름으로 설산(히말라야)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어느 날 공중에서

   諸行無常 是生滅法(제행무상 시생멸법)

  모든 것은 무상하나니, 이것이 곧 생멸의 법칙이다.

라는 시구가 들려왔고, 설산동자는 이 말이 자신이 찾던 깨달음이라며 기뻐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은 없고 오직 나찰만이 험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설산동자가 "방금 ‘제행무상 시생멸법’이라는 시구를 그대가 읊었는가?"라고 했고, 나찰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건 반쪽이고 뒷부분이 더 있을 거 같은데 나머지 부분도 들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나찰은 "들려주고 싶지만 지금 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소. 만일 그대의 뜨거운 피를 준다면 나머지 시구를 들려줄 수 있소."라고 했고, 설산동자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줄 테니 마지막 시구를 들려달라고 다시금 부탁했다. 이에 나찰이 뒷부분을 마저 읊었다.

  生滅滅已 寂滅爲樂.(생멸멸이 적멸위락)

  생멸이 끝나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이니, 그것이 극락이니라.

설산동자는 나찰과의 약속대로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서 몸을 던졌다. 그런데 나찰은 설산동자의 몸이 땅이 닿기 전에 인드라(제석천)로 변해서 설산동자의 몸을 받아서 땅에 내려놓았다. 경전에는 이때 여러 천신들이 모여 설산동자의 발에 절을 하면서 깨달음에 대한 구도의 정신과 서원을 찬탄하였다고 한다.(출처 : 나무위키)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시 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을 하고 배를 타기 위하여 백제로 가다가 밤이 늦어서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굴속에서 자고 가기로한다.

  밤에 잠에서 깬 원효대사는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을 찾다가 옆의 그릇에 담긴 물을 아주 달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깨어난 원효대사가 다시 물을 찾다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발견하게 된다.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그러다 아하! 하고 깨우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마음이 일어난 즉 여러 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로구나.

  삼계가 오직 마음뿐인데, 당나라에 가나 신라에 있으니 항상 그 마음인 것을...

  그리고 신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극락전 향向 좌측 외벽 벽화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와 함께 탁발하러 가시다가 길에서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모래와 흙으로 집을 만들고 또 신발에다 모래를 담아 밥이라고 얘기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때 놀고 있던 아이들은 저 멀리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떠 올렸습니다.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리면 큰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 ....'​

  이렇게 생각한 아이는 신발에 담아 놓은 모래 밥을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모래 밥을 받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난에게 건네 주셨습니다.

  "아난아, 이 모래로 내 방의 허물진 곳에 바르도록 하여라."​

  정사로 돌아 온 아난이 말씀대로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고 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모래라고는 하나, 어린 두 아이가 환희심으로 보시하였으니,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국왕이 되어 삼보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보탑을 세울 것이다."​

  그러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어찌 한 줌 흙의 공덕으로 그와 같이 큰 과보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니 임금과 부하들이 모두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법을 청하여 들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왕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았다. 왕은 그 기쁜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부처님의 형상을 팔만사천장을 그려 보시하였으며, 그 공덕으로 장차 팔만사천의 탑을 건립할 수 있는 과보를 얻게 되었다. 그때 왕이 바로 오늘 모래를 공양한 소년이니, 다음 생에는 다시 국왕으로 태어나 그 탑을 세울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백여 년 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던 인도를 통일하고, 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다스린 국왕으로 기록된 아쇼카왕이 있습니다. 바로 아쇼카왕의 전생이 그 소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결국 큰 상처를 받은 백성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살피고자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하신 말씀대로 아쇼카왕은 천여 명의 승려로 하여금 경전을 편찬케 하는 결집을 주최했고, 인도 전역에 불탑을 건립하는 한편, 해외 여러 나라에 불교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출처 : 해인사 월간 해인 1984년 01월 23호)

공자(孔子)는 3000가지 죄악 중에 불효(不孝)가 가장 큰 죄라 했고, 불가(佛家)에서는 양 어깨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수미산(須彌山)을 한 없이 돌고 돌아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지중(至重)하며 효도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제1장, 이 경을 설한 인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왕사성에 있는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3만 8천 인 및 여러 보살마하살과 함께 계셨다.

제2장, 마른 뼈의 가르침

그 때에 부처님께서 대중들과 함께 남방으로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보셨다. 부처님께서는 오체투지로 마른 뼈에 예배하셨다. 이를 보고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께서는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며, 여러 사람들이 귀의해 존경하옵는데 어찌하여 마른 뼈에 예배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나의 뛰어난 제자이고, 출가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널리 알지는 못하는구나. 이한 무더기의 뼈가 혹시 나의 전생의 오랜 조상이나 부모의 뼈일 수도 있기에 내가 지금 예배를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제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은 의문이 풀리지 않아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남자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사모로 장식하고 다니기에 남자의 몸인 줄 압니다. 또한 여자는 세상에 살아있을 때 연지와 곤지를 곱게 찍고 난초와 사향으로 치장하고 다니기에 여인의 몸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죽은 후의 백골은 모두 같사온데 저에게로 하여금 어떻게 구별해보라고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절에 가서 강의도 듣고 경도 외우며, 삼보에 예배하고 부처님의 이름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 뼈는 희고 또한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여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음욕이나 뜻을 두고, 아들딸을 낳고 키움에 있어, 한 번 아이를 낳을 때 마다 서 말 서 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자식에게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흰 젖을 먹어야한다. 그런 까닭으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어머님 생각에 마음이 마치 칼로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여쭙기를,

"부처님이시여, 어머니의 은덕을 어떻게 갚아야 되겠습니까?"

제3장, 잉태했을 때의 고통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길

"이제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소상하게 말해주리라. 어머니가 아이를 갖게 되면 열 달 동안 그 고통과 수고가 말할 수 없느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한 지 첫 달이 지나면 그 기운이 마치 풀 위에 맺힌 이슬과 같아서 아침에는 잘 보존하나 저녁에는 보존하지 못한다. 이는 이른 새벽에는 피가 모여 들었다가 낮이 되면 흩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잉태한 지 두 달이면 마치 엉킨 우유와 같이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셋째 달에는 태아가 마치 엉킨 피와 같으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넷째 달에는 점차로 사람의 모양을 갖추게 되며

어머니가 잉태한 지 다섯 달이 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섯 부분의 모양이 생겨나게 된다. 이 다섯 부분의 모양이란 머리가 한 부분이고, 두 팔꿈치를 합하여 셋이 되며, 무릎을 합하여 모두 다섯 부분이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여섯 달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여섯 가지 정기(六精)가 열리게 되느니라. 여섯 가지 정이란, 첫째 눈이 한 정기요, 둘째로 귀가 한 정기이며, 셋째는 코가 한 정기이며, 넷째 입이 한 정기이고, 다섯째 혀가 한 정기이며, 여섯째로 뜻이 한 정기이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일곱 달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3백 6십 뼈마디와 8만 4천의 털구멍이 생기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여덟 달이 되면 그 뜻과 꾀가 생기고 아홉 개의 구멍이 뚜렷하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아홉 달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무엇인가를 먹게 된다. 복숭아나, 배, 마늘은 먹지 않고 오곡만을 먹게 되느니라.

어머니의 생장은 아래로 향하고, 숙장은 위로 향한 사이에 한 산이 있는데 세 가지 이름을 갖느니라. 한 이름은 수미산이요, 또 한 이름은 업산이요, 또 한 이름은 혈산이다. 이 산이 한번 무너지게 되면 한 덩어리의 엉킨 피가 되어서 태아의 입속으로 흘러들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열 달이 되면 비로소 태어나게 되는데 만일 효순(孝順)할 아들이라면,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나오므로 어머니의 몸을 상하지 않게 한다. 그러나 만일 오역의 죄를 범할 자식이면 어머니의 아기집을 찢어 놓고, 손으로는 어머니의 심장이나 간을 움켜쥐며, 다리로는 어머니의 엉덩이뼈를 밟아서 어머니로 하여금 마치 1천개의 칼로 쑤시며 1만개의 송곳으로 심장을 쑤시는 것처럼 고통을 주게 된다. 이처럼 고난을 주고 이 몸 받아 생을 얻었음에도 그 위에 오히려 열 가지 은혜가 있는 것이다."

제4장,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여러 겁 거듭하여 온 무거운 인연으로

금생에 다시 와서 모태에 들었네.

날 지나고 달이 지나서 오장이 생겨나고

일곱 달이 되어서 육정이 열렸네.

한 몸뚱이 무겁기가 산악과 한 가지요

가고서는 몸놀림에 바람과 재앙 조심하며

좋고 좋은 비단옷 모두 다 입지 않고

매일 단장하던 거울에는 티끌만 묻었네.

둘째, 아이를 낳으실 때 수고하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아이를 배어 열 달 지나

어려운 해산날이 다가오면

아침마다 흡사 중병 든 사람 같고

나날이 정신마저 흐려지고

두렵고 겁난 마음 어이 다하리.

근심 짓는 눈물은 흉금을 채우고

슬픈 빛을 띠우고 주위에 하는 말

이러다가 죽지 않나 겁이 나네.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자비로운 어머니 그대 낳은 날

오장이 모두 열려 벌어진 듯

몸과 마음이 함께 까무러쳤고

피를 흘려놓은 것이 양을 잡은 듯하네.

낳은 아이 건강하다는 말 듣고

그 환희가 배로 늘었네.

기쁨이 가라앉자 다시 슬픔이 오고

아픔이 심장까지 미치네.

넷째,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뱉어 먹이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무겁고도 깊으신 부모님 은혜

베푸시고 사랑하심 한 때도 변치 않고

단 것은 다 뱉으시니 잡수실 것 무엇이며

쓴 것만을 삼키셔도 싫어함이 없으시네.

사랑이 무거우니 정을 참기 어렵고

은혜가 깊으니 슬픔만 더하도다.

다만 어린 자식 배부르기만 바라시고

자비하신 어머니 굶주려도 만족하시네.

다섯째, 마른자리 아이 누이시고 젖은 자리 누우시는 어머니 은혜를 노래하노라.

어머니 당신은 젖은 자리 누우시고

아이는 안아서 마른자리 누이시네.

두 젖으로는 목마름을 채워 주시고

고운 옷소매로는 찬바람 막아 주시네.

아이 걱정에 밤잠을 설치셔도

아이 재롱으로 기쁨을 다하시네.

오직 하나 아이를 편하게 하시고

자비하신 어머니 불편도 마다 않으시네.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어머니의 깊은 은혜 땅과도 같고

아버지의 높은 은혜 하늘과 같네.

깊은 마음 땅과 같고, 높은 마음 하늘같아

어머니마음 그러하고, 아버지마음 그러하네.

두 눈이 없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끝이 없고

손발이 불구라 해도 귀여워하시네.

내 몸 속에서 키워 낳으신 까닭에

온 종일 아끼시며 사랑하시네.

일곱째, 깨끗하지 못한 것을 씻어주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아아, 아름답던 옛 얼굴

아리따운 그 모습 소담하신 몸매.

푸른 눈썹은 버들 빛을 가른 듯

붉은 두 뺨은 연꽃 빛을 안은 듯

은혜가 더할수록 그 모습은 여위었고

더러움 씻기다 보니 이마에 주름만 느네.

아아, 아들 딸 생각하는 가없는 노고

어머니의 얼굴이 저리 변하였네.

여덟째, 자식이 멀리 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죽어서 이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살아서 생이별 또한 고통스러운 것.

자식이 집 떠나 멀리 나가면

어머니의 마음 또한 타향에 가 있네.

낮이나 밤이나 자식 뒤쫓는 마음

흐르는 눈물은 천 갈래 만 갈래

새끼를 사랑하는 어미원숭이 울음처럼

자식생각에 애간장이 녹아나네.

아홉째, 자식을 위한 마음으로 나쁜 업을 행하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아버지 어머니 은혜 강산같이 소중하나

갚고 갚아도 갚기 어려워라.

자식의 괴로움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단하면 어머니 마음 편치 않네.

자식이 먼 길 떠난다는 말 들으시면

가는 길 밤 추위 실로 걱정되네.

아들딸의 잠깐 고생도

어머니는 오래도록 마음 졸이네.

열째, 끝없는 자식사랑으로 애태우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깊고 무거운 부모님의 크신 은혜

베푸신 큰 사랑 잠시도 그칠 새 없네.

앉으나 일어서나 마음을 놓지 않고

멀거나 가깝거나 항상 함께 하시네.

어머님 연세 백세가 되어도

팔십 된 자식을 항상 걱정하시네.

부모님의 이 사랑 언제 끊어지리이까

이 목숨 다할 때가지 미치오니.

제5장, 부모님 은혜를 잊어버리는 불효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중생을 보니 비록 사람의 모양은 하였으나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부모님의 크신 은혜와 덕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잃고 은혜를 버리고 덕을 배반하며, 어질고 자비로움이 없어서 효도를 하지 않고 의리가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열 달 동안은 일어서고 앉는 것이 매우 불편하여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고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마치 큰 병든 사람과 같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을 때도 고통이 심하여 잠깐 동안의 잘못으로 죽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싸이며, 돼지나 양을 잡은 것처럼 피가 흘러 땅을 적신다. 온갖 고통을 이처럼 받으신 뒤, 이 몸을 낳아서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 먹이시며 안아주고 업어서 기르신다. 더러운 것을 빨아도 싫어하지 않으시고 더운 것도 참고, 추운 것도 참아 온갖 고생 마다 않으신다. 마른 곳을 골라서 자식을 누이시고 자신은 젖은 곳도 사양하지 않고 주무신다.

3년 동안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서 마침내 나이가 들면 예절과 의리를 가르치며, 시집 장가 들여 벼슬자리에 내보내기 위하여 공부도 시키고 직업도 갖게 한다. 이렇게 애써 가르쳐도 은혜로운 정이 끊겼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들딸이 병이라도 들게 되면 부모님 또한 병이 생기며, 자식의 병이 나으면 자애로운 부모님의 병 또한 나으신다. 이렇게 기르시면서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신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이윽고 자식이 다 자란 뒤에는 도리어 불효를 행한다. 부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눈을 흘기고 눈동자를 굴린다.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도 속이고 형제간에 서로 때리고 따르지 않고, 부모님의 가르침과 지시도 따르지 않고 형제간의 말도 일부러 어긴다.

출입하고 왕래함에 있어서도 어른께 말씀드리기는커녕 말과 행동이 교만하여 매사를 제멋대로 처리한다.

이런 것을 부모가 타이르고, 어른들이 그른 것을 바로 말해 주어야 하거늘 어린 아이라고 어여쁘게 생각하여 웃어른들이 덮어주기만 한다.

그래서 점점 커가면서 사나워지고 비뚤어져서 잘못한 일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성을 내게 된다.

또한 좋은 벗을 버리고 나쁜 사람을 벗으로 사귄다. 그러한 나쁜 습성이 천성이 되어 몹쓸 계획을 세우며, 남의 꾐에 빠져 타향으로 도망쳐가서 마침내는 부모를 배반하게 된다.

집을 떠나고 고향을 이별하여 혹 장삿길로 나가거나 혹 싸움터에 나가 지내다가 갑자기 객지에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혹은 타향에서 잘못하여 남의 꾐에 빠져 횡액으로 갇히게 되어 억울하게 형벌을 받기도 하며, 교도소에 갇혀 목에 칼을 쓰고 손발에 쇠고랑을 차기도 한다.

혹 우연히 병을 얻어 고난을 당하거나 모질고 사나운 운수에 얽혀 고통과 고난에 배고프고 고달파도 누구 하나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다. 남의 미움과 천대를 받아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어 죽게 되어도 구해주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다.

죽게 되어 시체는 부풀어 터지고 썩어서 볕에 쬐고 바람에 날려 백골만 뒹굴게 된다. 이렇게 타향 땅에 버려져서 친척들과 함께 만나 즐겁게 지내기는 영영 멀어진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식을 뒤쫓아 항상 근심하고 걱정으로 산다. 혹은 울다가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며, 혹은 비통하고 애끓는 마음에 기가 막혀 병이 되기도 한다. 혹은 자식생각에 몸이 쇠약해서 죽기도 하며, 이로 인해 외로운 혼이 원한이 되어서 끝내 잊어버리지 못한다.

혹은 다시 들으니, 자식이 효도와 의리를 숭상하지 않고, 나쁜 무리들과 어울려서 무례하고, 추악하고, 거칠고 사나워져서 무익한 일을 익히기 좋아하고, 남과 싸우며, 도둑질하고, 술 마시고 노름을 하며, 여러 가지 과실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형제에게까지 그 누를 끼치며 부모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와서 부모를 근심에 쌓이게 한다.

부모의 생활 형편이 춥거나 더운 것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저녁이나 초하루 보름에도 부모를 편히 모실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부모가 쇠약하여 모습이 보기 싫게 되면 오히려 남이 볼까 부끄럽다고 괄시와 구박을 한다.

혹은 또 아버지가 홀로 되거나 어머니가 홀로 되어 빈 방을 혼자서 지키게 되면, 마치 손님이 남의집살이하는 것처럼 여겨 평상과 자리의 먼지와 흙을 털고 닦을 때가 없으며, 부모가 있는 곳에 문안하거나 살펴보는 일이 없다. 방이 추운지 더운지, 부모가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 일찍이 알 까닭이 없다.

이리하여 부모는 밤낮으로 스스로 슬퍼하고 탄식을 한다.

혹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이것으로 부모님께 봉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도리어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하면서도, 혹 좋은 음식을 보면 이것을 가져다가 제 아내와 자식은 주면서도 추하고 못났다 하지 않고 피로하고 수고스럽지만 부끄럽다 하지 않는다.

또 아내와 첩에 대한 약속은 무슨 일이든지 잘 지키면서도 부모의 말씀과 꾸지람은 전혀 어렵고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딸자식일 경우 남의 배필이 되어 시집가게 되면, 시집가기 전에는 모두 효도하고 순종하더니 혼인을 한 후에는 불효한 마음이 점점 늘어난다. 부모가 조금만 꾸짖어도 원망하면서 제 남편이 때리고 꾸짖는 것은 이를 참고 달게 여긴다.

성이 다른 남편 쪽 어른에게는 정이 깊고 사랑이 넘치면서 자기의 육친에게는 도리어 소원하게 대한다.

혹 남편을 따라서 타향으로 옮겨가게 되면, 부모를 이별하고서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며 소식도 끊어지고 편지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부모는 간장이 끊어지고 오장육부가 뒤집힌 듯하여, 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마치 목마른 때에 물을 생각하듯 간절하여 잠시도 쉴 새가 없게 된다.

이렇게 부모의 은덕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건만 불효의 죄는 이와 같이 이루 다 말할 수 가 없다."

제6장, 부모님 은혜 갚기의 어려움

이때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은덕을 듣고 몸을 일으켜 땅에 던지고 스스로 부딪혀 몸의 털구멍마다 모두 피를 흘리며 기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한참 후에 깨어나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괴롭고 슬퍼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들은 이제야 죄인임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아무것도 몰라서 깜깜하기가 마치 밤에 길을 걷는 것 같더니 이제 비로소 잘못된 것을 깨닫고 보니 심장과 쓸개가 모두 부서지는 듯싶습니다.

바라옵건대 부처님이시여, 불쌍히 여기시어 구제해 주시옵소서.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겠습니까?"

이 때 부처님께서는 여덟 가지의 깊고도 무거운 범음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설명하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모시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모시고, 피부가 닳아져 뼈에 이르고 뼈가 닳아져 골수에 미치도록 수미산을 백천번 돌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굶주리는 흉년의 액운을 당해서 부모를 위하여 자기의 온 몸뚱이를 도려내어 티끌같이 잘게 갈아서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잘 드는 칼로써 부모님을 위하여 자기의 눈동자를 도려내어 부처님께 바치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아주 잘 드는 칼로 그의 심장과 간을 베어서 피가 흘러 땅을 적셔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괴로움을 참으며 백천 겁이 지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아주 잘 드는 칼로 자기의 몸을 찔러 칼날이 좌우로 드나들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몸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여서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뼈를 부수고 골수를 꺼내며, 또는 백천 개의 칼과 창으로 몸을 쑤시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뜨거운 무쇠탄환을 삼켜 온 몸이 불타도록하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이때에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깊은 은덕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이 이제야 큰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모님의 은혜를 갚으려거든 부모님을 위하여 이 경을 쓰고, 부모님을 위하여 이 경을 독송하며, 부모님을 위하여 죄와 허물을 참회하고, 부모님을 위하여 삼보를 공경하고, 부모님을 위하여 재계를 받아 지니며, 부모님을 위하여 보시하고, 복을 닦아야 하느니라.

만일 능히 이렇게 하면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이라 할 것이요, 이렇지 못한다면 이는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니라."

제7장, 불효에 대한 과보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불효한 자식은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치게 되면 아비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이 큰 지옥은 길이와 넓이가 팔만 유순이나 되고, 사면에는 무쇠 성이 둘려 있고, 그 주위에는 다시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느니라. 그리고 그 땅은 붉은 무쇠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며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느니라.

여기서 끓는 구리와 무쇠 녹인 물을 죄인의 입에 부어 넣으며, 무쇠로 된 뱀과 구리로 된 개가 항상 연기와 불을 토하는데 이 불은 죄인을 태우고 지지고 볶아 기름이 지글지글 끓게 되니 그 고통과 비통함은 견딜 수가 없느니라.

그 위에 무쇠채찍과 무쇠꼬챙이, 무쇠망치와 무쇠창 그리고 칼과 칼날이 비와 구름처럼 공중으로부터 쏟아져 내려 사람을 베고 찌른다. 이렇게 죄인들을 괴롭히고 벌을 내리는 것을 여러 겁이 지나도록하여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 쉴 사이가 없느니라.

또, 이 사람을 다시 다른 지옥으로 데리고 가서 머리에 화로를 이고 무쇠수레로 사지를 찢으며, 창자와 살과 뼈가 불타고 하루에도 천만번 죽고 살게 한다.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모두 전생에 오역의 불효한 죄가 저질렀기 때문이니라."

제8장,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

이때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부모님의 은덕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들이 이제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부모님을 위하여 이 경전을 다시 펴는 일을 한다면 이것이 참으로 부모의 은혜를 갚을 것이 되느니라.

경전 한 권을 펴내면 한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오, 백 권을 펴내면 백 부처님을 뵈옵는 것 이오, 천 권을 펴내면 천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오, 만 권을 펴내면 만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 니라.

이렇게 한 사람은 경을 펴낸 공덕으로 모든 부처님들이 오셔서 항상 옹호해 주시는 까닭에 이 사람이 부모로 하여금 천상에서 태어나게 하여 모든 즐거움을 받으며 지옥의 괴로움을 영원히 여의게 되느니라."

제9장, 부처님께 맹세

이때 여러 사람 가운데 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人非人)·천(天)·용·야차·건달바와 또 여러 작은 나라의 왕들과 전륜성왕과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각각 이렇게 발원했다.

"저희들은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차라리 이 몸이 부서져 작은 먼지같이 되어서 백천 겁을 지낼지 언정 맹세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백천 겁 동안 혀를 백 유순이 되도록 빼어내어 이것을 다시 쇠보습으로 갈아서 피가 흘러 내를 이룬다 해도 맹세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백천 자루의 칼로 이 몸을 좌우로 찌르더라도 맹세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 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작두와 방아로 이 몸을 썰고 찧고 하여 백천만 조각을 내어 가죽과 살과 힘줄 과 뼈가 모두 가루가 되어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끝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제10장, 이 경의 명칭

이 말을 듣고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 하여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대부모은중경》이라 할 것이며 이렇게 이름을 지어 너희들은 항상 받들어 지닐 지니라."

이 때 모든 사람 가운데 천(天)·인(人)·아수라 등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이 말을 믿고 받들어 그대로 행할 것을 맹세하고 절하고 물러갔다.

보무모은진언(報父母恩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

왕생정토진언(往生淨土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남 옴 싯데율이 사바하

대보부모은중진언(大報父母恩重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7번)

다생부모 왕생정토진언(多生父母往生淨土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나 옴 싯데율이 사바하(7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또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부모의 은혜가 높고 넓음을 가르치고, 이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는 대승불교 불경이다.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으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중국을 거쳐 전래되면서 유교적 효를 배척하지 않고, 불교적인 효도를 설한 경전이다. 한국, 중국, 일본에 널리 퍼져 있으며 한국에서는 유교가 성행하던 조선 시대에 널리 읽혀졌으며, 삽화를 곁들인 언해본 출판도 성행했다.

성립 시기가 확실하지 않고, 유교의 사상을 강조하기 때문에 위경(僞經 :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부처가 직접 설하지 않은 불교경전)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미 기원후 2세기 안세고가 번역한 (불설)부모은난보경(佛說父母恩難報經 : 후한(後漢)시대에 안세고(安世高)가 148년에서 170년 사이에 번역하였다. 줄여서 『난보경』 · 『부모은난보경』이라 하고, 별칭으로 『부모은근보경』이라고도 한다.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 방법 중의 하나로 부모님이 부처님 법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설한다.)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출처 : 위키백과)

  중국 오대산 중턱의 외딴 암자 금강굴에서 한 스님이 손수 밥을 해먹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무착(無着; 821-900)이라는 법명을 받아 계율과 교학을 공부하다가 문수보살의 영지(靈地) 오대산에 참배하고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자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식량이 떨어져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양식을 탁발해 올라 오다가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노인의 모습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한참을 뒤쫓아 가다 보니 전혀 보지 못했던 웅장한 절 한 채가 나타났다. 노인이 문 앞에 서서 “균제야! ” 하고 부르니 한 동자가 뛰어나와 소고삐를 잡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따라 들어가 노인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동자가 아주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내왔다. 노인이 묻기를
  -자네는 오대산에 무엇하러 왔는가?
  -저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그 가호를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가히 문수를 만날 수 있을까? 자네 살던 절에는 대중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300여명 되는 대중이 경전도 읽고 계율도 익히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떠한지요?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요, 용과 뱀이 뒤섞여 산다네.(龍蛇混雜 凡聖交參)
  무착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서 무착은 노인에게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하였더니
  -애착이 남아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고 갈 수 없네. 하고는 동자에게 배웅하게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둑해진 길가에 나와서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아까 노인에게 이곳 대중의 수효를 물었더니 전삼삼 후삼삼 이라고 하시던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동자가 큰 소리로 무착아! 하고 부르니 엉겁결에
  -네.
  하고 대답하자,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고?
  하며 동자가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무착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혀 동자를 쳐다 보며
  -이 절 이름은 무엇입니까?
  -반야사(般若寺)라고 합니다.
  하며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웅장하던 절은 금시에 간 곳이 없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동자도 사라지고 없는데, 허공에서   한 귀절 게송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요한 향이로다(口裡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心裡無瞋是眞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無染無垢是眞常)

  균제 동자도 절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자리에 다만 오색구름 가운데 문수보살이 금빛 사자를 타고 노니는데, 홀연히 흰 구름이 동쪽에서 와서 감싸버리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무착이 게송을 읊었다.

온 누리가 그대로 성스러운 가람일세(廓周沙界聖伽藍) 
눈에 가득히 문수보살 만나 말을 나누었으나(滿目文殊接話談)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니 어찌하랴(言下不知開何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옛 산과 바위뿐일세(廻頭只見翠山巖)

  이렇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무착은 더욱 수행에 힘써 앙산 선사(仰山; 840~916)의 법(法)을 이어받아 어디에도 거리낄 바 없는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동짓날이 되어 팥죽을 쑤고 있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 속에서 거룩하신 문수보살이 장엄하게 나타나서는
  -무착은 그 동안 무고한가?
  하며 옛날 오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시키며 먼저 인사말을 건냈다. 그런데 무착스님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팥죽을 젓던 주걱을 들어 문수보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문수보살은 놀래어
  -어이, 무착 내가 바로 자네가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하던 문수일세 문수야!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받은 무착스님은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 만일 문수가 아니라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리라.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쓴 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내 삼대겁(三大劫)을 수행해 오는 동안 오늘에사 괄시를 받아 보는구나.
  하는 말을 마치고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금강굴에서 3년 간이나 기도를 하고, 또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다녔던 무착이었건만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문수보살이 스스로 나타나셨어도 도리어 호령을 하고 주걱으로 얼굴을 갈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체득한 선사들의 기백이요 실력인 것이다.(출처 : 해인사 해인 1983년 02월 12호)

  갈대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달마

  달마대사는 남인도 사람으로 중국에 선(禪) 불교를 전파한 분이다. 어릴 적 ‘보리다라’라고 불렸는데 당시 인도 최고의 도인인 반야다라 존자의 제자가 되었다.

  반야다라는 보리다라가 선정에 든지 7일 만에 깨달음을 얻음에 따라 ‘보리달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되는데 달마(達磨)는 통달하고 크다는 뜻이다.

  스승이 열반한 뒤 달마는 스승의 유언을 따라 북쪽에 부처님의 법을 펴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달마대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지금의 광주로 양나라 땅이었다. 당시 양 무제(武帝)는 불교를 위해 헌신했다고 칭송이 자자했었다. 무제는 수많은 절과 탑을 지었으며 스님들을 공양했고 이같은 이유로 스스로 한량없는 복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무제는 달마대사가 중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궁으로 초빙했다.

  무제는 “수많은 절을 건립하고 경전을 펴냈는데 어떤 공덕이 있냐”고 묻자 달마대사는 “공덕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무제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공덕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불교의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실천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달마대사는 “탑과 절을 다 헐어버리시오”라고 답했다.

  달마대사는 무제가 유루복(有漏福)을 지어 놓고 교만한 마음으로 무루복(無漏福)을 지은 양 자랑하는 것은 공덕이 되지 않는다고 우회적으로 질타했다.

  무제는 달마대사의 말을 듣고 자신의 공덕과 선행이 무시 당한데 대해 노여움을 참을 수가 없었고, 달마대사는 무제와 인연이 닿지 않음을 알고 양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달마대사가 양자강을 건너려는 순간 무제의 군사들이 달마대사를 체포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군사들은 양자강 강변을 에워쌌고 달마대사는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달마대사가 살길은 오직 양자강을 건너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갈대 이파리가 강물을 따라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것을 발견한 달마대사는 그동안 연마한 비장의 공법을 써서 갈대 이파리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합장한 자세로 갈대 끝을 잡은 달마대사는 무사히 강을 건너 위나라 소림사로 향했다. 달마대사가 갈대 이파리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모습을 목격한 군사들은 크게 뉘우쳤다고 한다.

  사찰 벽화 가운데 달마대사가 갈대 이파리 하나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일위도강(一葦渡江)’이다.

  소림사에 도착한 달마대사는 9년 동안 수행했는데 대사의 수행방편인 면벽좌선은 선(禪) 수행의 핵심이 됐고, 향후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전해지게 됐다.(출처 : 해인사 벽화 이야기)

흰뼈와 검은뼈 [부모은중경]

  석가모니 부처님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풀이 무성한 산속에서 땅에 흩어진 사람의 뼈 한 무더기를 발견하고는 정중히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제자 아란이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님, 세존님께서는 삼계(三界)의 도사요, 사생(四生)의 자부이신데 어찌하여 그런 해골바가지에게 절을 하십니까?」
  「 아란이여, 네가 출가하여 나를 따른 지 이미 오래인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런 도리를 모르느냐?

  「저 해골이 전날 내 부모 형제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지금 이 속에는 옛날 나의 아버지의 뼈와 어머니의 뼈가 섞여 있구나.」

  「 무엇을 보시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뼈를 구별하십니까?」
  「어머니의 뼈는 검고 가볍고 아버지의 뼈는 희고 무겁다. 어머니는 한 번 자식을 낳을 때마다 서 말 석 되의 피를 흘리고, 그   자식을 기르는데 여덟 섬 네 말의 젖을 먹이는 까닭이며, 수태로부터 생육에 이르기까지 뼈를 깎는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은혜가 있으나 부모님의 은혜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

  부처님은 말을 마치고 흩어진 뼈를 한곳에 모아 고이 땅에 묻어 주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부처님은 그 많은 제자들 앞에서 손을 모으고 뜻을 거두어 해골더미에 공손히 절을 하였던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이란 일생일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중무변법계연기(重重無邊法界緣起)의 도리가 항상 우리가 사는 법계(法界)에 충만해 있는 것이다.

  중중무변법계연기(重重無邊法界緣起)란, 모든 인연법(因緣法)은 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영겁(永劫)을 통해 삼세(三世)에 걸쳐 거듭 거듭 이어져 끝이 없다는 말이다.(출처 : 서방정토 감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