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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광해군 태실(光海君 胎室)

노촌魯村 2023. 8. 17. 20:39

2023.8.17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의 광해군 태실 입구에 있는 안내문
2023.8.17 현재의 모습
태실의 석재들을 모아 둔 곳

2019.12.16  광해군 태실(光海君 胎室) 답사에서 촬영한 사진들

다음 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다음 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연경동 들판에서 본 태봉 

광해군 태실(光海君 胎室.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654)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있는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의 태실. 태실(胎室)은 조선 왕실에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 아이의 태를 길한 곳에 묻던 곳을 말한다. 아이의 태를 소중히 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중요하다고 여겼고, 특히 왕실의 경우에는 국운과도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광해군왕 태실(光海君王 胎室)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태실인데, 1609년에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조성된 가봉 태실(加捧胎室)이다.

가봉 태실이란,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추가로 석물을 올려 치장한 태실을 말한다.

광해군왕 태실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654에 있다. 연경동에는 태봉마을이 있는데, 마을 뒤에는 태봉(胎峰)이라는 봉우리가 솟아 있고 마을 이름도 ‘태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태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은 예부터 태가 묻혀 있다고 하여 붙여졌고, 예부터 묻힌 태가 바로 광해군의 것이었다.

광해군 태실은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2018년에 발굴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에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 태실은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 11월에 조성되었다. 태실의 조성은 대구부사 안희(安熹)[1551~1613]가 주관하였다. 조정에서는 태실상사(胎室上使) 이호민(李好閔)과 함께 태실부사(胎室副使)로 김상용(金尙容)을 대구로 보내어 감독하게 하였다.

『광해군 일기』 1610년(광해군 2) 9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태실을 조성하고 나서 “돌에 틈이 갈라진 흔적이 많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611년 9월 30일 사헌부가 보고한 곳에 “대구부사 안희가 수토관(守土官)으로서 태봉(胎封)을 고쳤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구부사가 다시 태실을 수리한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왕 태실에 남아 있는 태실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태실비에는 ‘왕자경용아기씨태실(王子慶龍阿只氏胎室)’이라는 비제가 새겨져 있고, 파편에는 “만력 3년 1월 일 세움[萬曆三 一月 日 建]”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광해군왕 태실은 2020년 현재까지도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며, 안내판 외에는 별다른 보호 시설도 없는 상태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광해군 태실비 받침(귀부)

 태실비의 받침돌(귀부)의 일부가 남아 귀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음

  태실비의 받침돌(귀부)의 파손 된 모습

 참담하게 파손된 태실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글씨

광해군(光海君)  조선 제15대 왕(1575~ 1641 재위 기간은 1608~1623).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세자로서 난의 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실리적 외교로써 명·청 교체의 국제 정세에 대처했다. 또한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경기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당쟁에 휩쓸려 임해군과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하였으며,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유(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悰)을 받들어 반정을 일으킴에 따라 폐위,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제주도 등에 유배되었다.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도시개발 예정지로 텅빈 태봉 아래의 연경동 

道德 마을 樹口幕(도덕 마을 수구막) 전설

북구 연경동에는 도덕 이라는 마을에 수구막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조선 선조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태어나자 성산과 명달을 찾다가 연경동 뒷산에 그태를 안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봉우리 밑의 마을을 태봉이라 하고,왕자의 태실(왕실에서 태를 묻던 석실)이니 만큼 석물이 웅장하여 화려했으며 석상이 아주 훌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연경동 뒷산에 태실이 생기고 난 뒤부터 그 윗마을 도덕에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마을의 과년한 처녀나 시집 온 새색시 들이 봄만 되면 태봉쪽을 하엽없이 바라보다가는 마침내 미쳐 마을을 도망치는 일이 자꾸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일이 해를 거듭하여 계속되자 마을에서는 이리저리 고민을 하다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해 보니 태봉의 석상한테 반해서 마을 여자들이 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실의 석물을 없앨 수 는 더더욱 없는 것이라 궁리 끝에 앞에 소나무를 심기로 했습니다.

이곳은도덕마을에서 보면 태봉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마을 전체가 소나무를 가꾸기 시작했고 그숲의 이름을'수구막'또는'수구맥'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후로는 여자가 바람이 나서 마을을 떠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그 숲 속에서 풍악을 울리고 한 해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원하고 또 고마움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풍습은 1960년대 후반까지 있어 왔으며 그때까지 울창했던 소나무 숲이 솔잎 혹파리와 태풍으로 한거번에 죽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택지 개발로 인해 마을도 없어 지고 그 형태를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한다.(향토자원-지역정버 포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