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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계서원(西溪書院)

노촌魯村 2023. 8. 17. 20:18

서계서원(西溪書院.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서계서원(西溪書院)은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인천이씨(仁川李氏) 공도공파(恭度公派)의 대표 서원이다.

서계서원에는 조선 말 명필인 윤용구(尹用求)가 쓴 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본래는 동재와 서재가 모두 있었으나 지금은 사우, 강당, 환성정(喚惺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환성정은 본래 동화천과 금호강이 합수하는 인근 창포리[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무태성당 서쪽 산기슭]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으로, 당대 유명인들의 편액과 시판들이 많이 걸려 있다.

서계서원 입구에는 조선시대 인천이씨 문중 여인들의 열부 정려각 3개가 있다.

이문화의 본관은 인천이며, 자는 백중(伯仲), 호는 오천,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이문화는 고려 말 우왕 때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관직은 예문관대제학,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좌참찬, 의정부사 겸 성균관지사, 개성유후, 경기·영남·호서·서북면의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문화는 1414년(태종 14) 57세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태종은 3일간 조회를 철폐하고 왕명으로 예장(禮葬)을 내렸다. 또한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하고 ‘공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주는 이문화의 8세손으로 자는 경임(景任), 호는 육휴당(六休堂) 또는 태암이다. 이주의 아버지는 이문성이며, 어머니는 창원황씨이다.

이주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무태[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로 입향한 이후 이주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인천이씨의 무태 입향조가 되었다.

23세 때 육휴당을, 27세 때는 환성정을 지어 학업의 장소로 삼았다. 이주는 생원·진사 시험과 동당시에서 모두 장원을 하여 ‘삼장원(三壯元)’이라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팔공산에서 여러 인물들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여 공사원 겸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전란 이후에는 황폐해진 대구 지역의 문풍을 일으키기 위하여 대구향교와 대구 최초의 서원이었던 연경서원 재건에도 앞장섰다.

대구 지역 성리학 계보로 볼 때 이주는 낙재 서사원·모당 손처눌 등과 함께 조선 후기 대구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서계서원은 1781년(정조 5)에 창건하였고,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91년에 중건하였다.

서계서원의 강당은 정면이 방 3칸, 대청 2칸이며, 측면은 2칸이다. 원주(圓柱) 주춧돌 위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 화강석 기단 위에 건립되었다. 경내에 환성정이 있으며,

뜰에는 보호수인 배롱나무가 있고, 대문인 향의문(向義門) 곁에는 서계서원 사적비가 있다. 강당 뒤에 이문화와 이주를 제향하는 사우가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환성정
조선 말 명필인 윤용구 ( 尹用求 ) 가 쓴 현판
서계서원 입구에는 조선시대 인천이씨 문중 여인들의 열부 정려각 3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