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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구 경상감영지(大邱 慶尙監營址. 사적)

노촌魯村 2024. 3. 20. 19:20

경상감영공원 안내도

대구 경상감영지 (大邱 慶尙監營址. 사적)
조선 시대에는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지방 통치를 맡게 하였으며, 대구 경상감영은 조선 후기 경상도를 다스리던 지방관청으로 관찰사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경상도에는 조선 태종대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별도의 감영(監營, 조선 시대 각 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던 관청)없이 관찰사가 도내를 순력(巡歷, 조선 시대 감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찰하던 제도)하였으며, 선조 34년(1601년)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다.(출처 : 문화재청)


경상감영공원(대구광역시 중구 경삼감영길 99 (포정동))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공원이다.
이 공원은 주로 인근 직장인들의 휴식처로 이용되며, 주위에 극장들이 몰려있어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많이 찾고 있으며, 잔디밭과 분수 사이로 수목이 우거져 있고, 벤치도 충분히 마련되어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기반으로 나날이 발전해 온 대구는 조선초기부터 현저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특히, 1592년부터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군사.지리적 중요성까지 부각되어 1601년 마침내 경상감영이 도래하게 된다.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행료.사법.군사를 담당하는 중심기관으로, 대구는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요건을 두루 만족시키는 적소였다
경상감영공원은 바로 경상감영의 옛터이다. 경상감영은 그후 300년간 대구에 존속하면서, 대구가 오늘날 우리나라 제3의 도시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경내에는 경상감사가 집무를 보던 정청(政廳)인 선화당(대구유형문화재 제1호)과 관찰사의 처소였던 징청각(대구유형문화재 제2호)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관아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전국적으로도 드물어 큰가치를 지닌다.(출처 : 대구 중구청)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성장을 거듭한 대구지역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국방상의 중요성까지 부각되어 마침내 안동에 있던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본래 경상감영은 달성 (현 대구달성공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잠시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선조 34년 관찰사 김신원 때 지금 이곳으로 이전 되었습니다.
그 후 현종 11년 (1670), 영조 6년 (1730), 순조 6년 (1806) 세 차례의 화재를 겪으면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순조 7년(1807)관찰사겸 부사인 윤광안에 의하여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부지는 1910~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되다가 도청이 옮겨간 후 1970년 공원조성을 마치고 "중앙공원"이란 명칭으로 개장하였습니다. 공원 내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이 있으며,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경내에는 경상감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대구유형문화재 제1호)과 처소인 징청각(대구유형문화재 제2호)이 세워져 있으며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29기)가 있습니다.
또한, 푸른 숲과 아름다운 꽃, 잘 정돈된 잔디광장, 무더위를 해소시켜주는 분수, 아늑한 산책로와 벤치 등이 마련되어 있어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복잡한 도시생활 속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조용한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포도대장 복장의 근무자를 비치하고, 주말엔 풍속 재현 행사 및 전통 놀이 체험을 진행하는 등 옛 조선으로의 타임머신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출처 : 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大邱 慶尙監營 宣化堂. 보물)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중 최상위 관직자였던 종2품 관찰사가 파견된 감영(監營) 중 경상도 감영의 정당(正堂)을 말한다.
선화당은 1807년에 중건된 이후 몇 차례의 수리를 거치면서 다소 규모의 변화가 보이나 대체로 건립 당시의 건축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경상감영 선화당의 공포와 부재 가공기법은 전반적으로 1807년 중건 시기를 잘 반영하고 있어 조선후기 지방 관아건축의 형식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세부적으로는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2고주 7량가의 지붕가구를 이루고 있고, 지붕마루의 양성 마감과 용마루에 취두를 갖춘 팔작지붕 등은 조선후기 관아건축으로서 위계와 높은 품격의 건축적 특성을 갖고 있다. 1807년 중수공사 당시 자재조달을 다룬 문서가 뒷받침되어 중건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점도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시대 팔도와 읍치에 설치되었던 수많은 관청 건물 가운데서 현존하는 드문 사례로서 조선후기에 다시 시작된 강우 측정 기구인 측우대, 깃대를 꽂았던 깃대꽂이 등도 남아 있어 감영의 공간구성과 운영시설을 살필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은 400여 년간 제자리에서 이어져 왔으며, 인근의 징청각(澄淸閣,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과 함께 규모, 구조의 원형을 유지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타 용도로 전용되면서 일부 변형을 거쳤지만 전체적으로는 원형을 유지한 편으로 조선시대 감영을 이해하는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로 손꼽을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징청각(澄淸閣. 유형문화재)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8칸·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징청각은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