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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경산

불굴사(佛窟寺)와 홍주암(紅珠庵)

노촌魯村 2024. 4. 11. 19:07

2024.4.10 불굴사

불굴사(佛窟寺)

불굴사는 690년(신문왕 10)에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고, 옥희대사(玉熙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 원효대사가 불굴사 석굴에서 수행한 것을 계기로 옥희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이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데,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전각 50여 동, 부속 암자 12개, 물방아 8대를 갖추고 승려와 신도들을 공양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불굴사는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 이르러 중창하였다. 그러나 1736년(영조 12) 홍수와 산사태로 전각이 모두 매몰되었다. 이후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한 노승이 불굴사로 와서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1860년(철종 11)에 유혜(有惠)와 쾌옥(快玉)이 중창하였으며, 1939년에 은해사의 장경파백현(張鏡波伯鉉)이 다시 중창하였다.

1988년에 원조(圓照)가 대웅전의 본래 위치를 찾았는데, 그 자리에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완공하였다.

진신사리는 1988년에 1과, 1990년에 7과를 각각 사리탑에 봉안하였다. 2014년에 사리탑의 사리를 이운(移運)하였는데, 모두 25과로 증식되었다고 한다. 1990년에 약사보전(藥師寶殿)을 신축하였으며, 2018년에 주지 덕관이 관음전(觀音殿)을 신축하고, 2019년에 석등을 복원하였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불굴사 삼층석탑

경산 불굴사 삼층석탑(慶山 佛窟寺 三層石塔. 보물) :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채의 건물과 12암자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탑은 절 안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올린 형식으로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적멸보궁

불상을 두지 않고 법당 뒤편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법당 안에서 투명 유리창을 통해 사리탑을 바라보면서 예배를 올린다.

약사보전

불굴사석조입불상(佛窟寺石造立佛像)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로 약사보전(藥師寶殿) 안에 봉안되어 있다. 고려 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불굴사석조입불상은 화강암으로 조각한 받침대 위에 불상을 세운 형태이다.

받침대는 2단으로 하단은 네모난 형태, 상단은 둥근 형태이다.

하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상단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233㎝, 어깨 너비 75㎝, 머리 높이 53㎝이다.

불상의 몸에 비해 머리 부분이 다소 크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 굵고 둥근 육계(肉髻)가 있으며,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얼굴의 입·눈·코·귀는 훼손되어 얼굴 크기에 맞게 다시 새겨진 것으로, 입의 형태는 작고 양쪽 입꼬리가 깊게 새겨졌다.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앞으로 향한 모습이나 왼손은 없어져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지금은 수리되어 보주(寶珠)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발목까지 덮고 있으며 뒷면 옷 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목 아래쪽과 머리 쪽에 있는 큰 구멍은 석재나 금속재의 광배(光背)를 붙이기 위한 삽입공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머리 부분이 다소 크게 조각되어 있어 등신비율이 도식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이러한 기법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굴사석조입불상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관음전
지장전
미륵전
산령각. 독성각
굴불사 맷돌(사찰의 규모를 짐작 할 수 있다)
홍주암

홍주암(紅珠庵)

홍주암(紅珠庵)은 불굴사(佛窟寺) 산내에 있는 암자이다.

불굴사 경내에서 북동쪽 절벽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면 나오는 자연 동굴이 홍주암이다. 동굴 입구 암석에 붉은 글씨로 ‘紅珠庵’이 음각되어 있다.

‘홍주’는 붉은 구슬로 태양을 뜻한다.

홍주암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수도한 동굴이라 해서 원효암(元曉庵) 또는 불암(佛庵)으로도 불린다.

홍주암의 역사는 불굴사와 궤를 같이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굴사는 690년(신문왕 10)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원효대사가 불굴사 석굴에서 수행한 것을 계기로 옥희대사(玉熙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찰에 대한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전기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을 공양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홍주암 역시 사찰 내력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사찰과 관련하여 원효대사가 불굴사를 창건하기 전에 동굴에서 기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동굴이 홍주암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건립 연대는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1976년 석굴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불상 1점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하였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홍주암(紅珠庵)은 불굴사(佛窟寺) 산내에 있는 암자. 불굴사 경내에서 북동쪽 절벽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면 나오는 자연 동굴이 홍주암이다. 동굴 입구 암석에 붉은 글씨로 ‘紅珠庵’이 음각되어 있다. ‘홍주’는 붉은 구슬로 태양을 뜻한다. 홍주암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수도한 동굴이라 해서 원효암(元曉庵) 또는 불암(佛庵)으로도 불린다.

원효굴
원효굴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
독성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