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산서원(鵄山書院)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선현 추모, 향촌 교화를 담당하던 사설 교육 기관이다. 치산서원(鵄山書院)은 박제상(朴堤上)을 모신 서원이다. 박제상은 눌지왕 때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두 아우를 구하고 자신은 왜에서 순절하였다. 박제상과 부인 김씨, 두 딸은 인근 치술령에 올라가 왜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745년 영조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 김씨, 두 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치산서원을 세우게 하였다.
[변천] : 창건 당시 서원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忠烈廟)와 부인 김씨를 모신 신모사(神母祠), 두 딸을 모신 쌍정려(雙旌閭)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건축물은 1864년(고종 1)을 전후한 시점에 흥선대원군이 서원 폐단을 통감하고 철폐할 때 모두 훼철되어 충렬사와 신모사는 터만 남았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울주군에서 복원 공사를 하여 충렬사, 신모사, 쌍정려, 관설당 등 약 8,300㎡[2,500평]에 13동을 복원하였다.
[형태] : 치산서원은 강당인 관설당이 전면에 있고, 사당인 충렬사가 뒤편에 있는 전학 후묘형 서원이다. 관설당은 5량 팔작 홑처마 기와지붕에 초익공 건물이고 기둥은 앞 열만 원기둥이다. 사면 모서리 추녀 쪽에는 선자서까래를 설치하였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좌우 방을 전면까지 설치하지 않고 툇간 형태로 일부 남겨 놓은 특이한 구조이다. 기단은 두벌대 막돌 바른층쌓기를 하였고 초석은 자연석이다. 뒤편 충렬사는 맞배 기와지붕이고 부연을 설치한 겹처마 형식이며 좌우에는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에 강당인 관설당이 있고 좌우에 동재·서재가 있다. 뒤로 돌아 내삼문을 지나면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와 부인 김씨를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 3동이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충렬묘 앞에는 전사청이 설치되어 있다. 울주군에서 박제상과 부인 김씨, 딸들을 기리기 위해 1987년 한국교원대학교에 의뢰하여 유적지 발굴 사업을 벌였다. 4차에 걸쳐 발굴된 유물은 인근 충렬공박제상기념관에 전시되었다. 울주군은 1991년 11월 23일 박제상을 비롯한 부인 김씨와 두 딸에 대한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음력 3월 11일 추모제인 춘향제를 지낸다. 박제상유적은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울산광역시 울주군청에서 소유하여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 치산서원은 지방에 대부분 있는 문중 서원이 아니라 신라시대 충신을 모신 특이한 서원이다. 복원 후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좋은 교육 자료로 사용한다.(출처 : 울산역사문화대전)
1987년 한국교원대학교에 의뢰하여 유적지 발굴 사업을 벌였다. 4차에 걸쳐 발굴된 유물은 충렬공박제상기념관에 전시되었다.
박제상(朴堤上)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에 배향된 신라시대의 충신.
[개설] : 박제상(朴堤上)[?~?]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 있던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의 동생들을 구출하고 왜에서 순국한 인물이다. 박제상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설화들은 눌지왕 당시 고구려와 왜 등 신라를 둘러싼 국제 정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가계]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박제상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이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파사왕]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아버지는 물품파진찬(勿品波珍湌)이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가계도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 간의 활동 시간 차이가 많아 사실 여부에 논란이 있지만, 박제상은 신라의 박씨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성왕(實聖王)의 딸인 치술부인이 박제상의 아내라는 주장도 있다.
[활동 사항] : 박제상은 눌지왕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에서 복호(卜好)[보해]를 구하고, 왜에서 미사흔(未斯欣)[미해]을 구출한 뒤 자신의 신하가 되라는 왜왕의 요구를 거절하여 죽음을 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박제상 관련 설화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눌지왕은 왕에 오른 뒤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들을 데려오고 싶었다. 방법을 모색하던 중 신하들은 삽량주[현 경상남도 양산시]의 태수로 있던 박제상과 의논하여 볼 것을 권유하였다. 눌지왕은 박제상을 불러 자신을 뜻을 전하였다. 왕의 명령을 받은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 복호를 몰래 만나 감시를 피해 도망을 시도하였다. 복호가 고구려에 있으면서 평소 자신을 감시하는 고구려 병사들에게 인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고구려 병사들은 도망가는 복호를 향해 촉을 뺀 화살을 쏘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귀국한 복호를 본 눌지왕은 왜에 볼모로 간 미사흔을 더욱 그리워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왜로 향하면서 왕이 박제상의 가족을 죽여 그가 도망갔다는 소문을 내도록 하였다. 박제상은 울산 율포에서 배를 띄웠다. 왜왕을 만난 박제상은 신라에서 도망을 왔다고 하였다. 왜왕은 사람을 시켜 박제상의 말이 맞는지 확인한 다음 박제상이 미사흔 왕자와 교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박제상은 미사흔과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좋은 물고기를 잡으면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의 신망을 얻어 감시가 느슨해질 즈음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 날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시간을 끌기 위해 혼자 남았다.
미사흔은 무사히 신라로 돌아갔고, 왜왕에게 잡힌 박제상은 자신의 신하가 되라는 왜왕의 회유를 뿌리쳤고, 왜왕은 박제상을 화형시켰다. 미사흔이 귀국하자 눌지왕은 박제상의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켰고, 박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으로 삼았다. 한편 박제상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아내는 박제상이 배를 띄운 율포가 바라보이는 치술령에 올라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몸은 돌이 되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 들어 산기슭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는데, 그 영혼의 새가 숨어든 곳을 은을암이라고 하였다.
[출생지] : 박제상의 출신지에 대하여는 울산 출신설, 경주 출신설, 양산 출신설 등 논란이 있다. 박제상이 파사왕의 자손이라는 기록은 그가 경주 출신이라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양산 출신설의 경우에는 양산의 옛 지명인 삽라군의 태수라는 점이 강조된다.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치적 상황에서 지역의 태수는 지방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때 박제상은 양산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울산 출신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보이는 지명과 관련이 깊다. 『일본서기』에 “신라 왕은 오례사벌(汙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이들은 인질로 와 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데리고 가려는 생각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례사벌, 모마리질지, 부라모지 세 명이 미질허지벌한을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오례사벌’을 서라벌과 같은 지명으로 볼 때, 오례사벌의 모마리질지와 부라모지가 미질허지벌한을 데리러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박제상의 다른 이름인 ‘모말’과 ‘모마리질지’는 ‘박제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례사벌’의 ‘오례사’는 음운상 울산의 옛 이름인 ‘굴아화’나 ‘우시산(于尸山)’과 통한다고 보면 ‘오례사벌’은 울산이 되는 것이다.
[학문과 저술] : 『부도지』라는 책을 저술하였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 박제상은 순국 후 신라 17관등 가운데 다섯 번째인 대아찬에 추증되었다. 매년 3월 초 정일(丁日)에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치산서원(鵄山書院)에서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다. 치산서원은 치술 산신모가 된 박제상의 아내를 모시기 위해 만든 신모사(神母祠)를 1745년(영조 21) 서원으로 고친 것으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91년 복원되었다.(출처 : 울산역사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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