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족·귀족들의 참례처
울주 천전리 각석(별칭 : 천전리 서석,서석곡)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국보가 된 붉은 바위]
바위는 전 세계적으로 주술이나 종교의 대상으로 가장 오랜 형태 중의 하나였고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가장 끈기 있는 신앙 대상 중의 하나이다. 바위는 그 견고함, 지속성, 장대함으로 인간 조건의 불안전성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 즉 절대적인 존재 양태를 인간에게 제시해 준다. 인간은 바위의 크기, 딱딱함, 형태, 색을 통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세속적인 세계와는 다른 어떤 세계에 속하는 실재와 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바위는 초자연적 힘이나 신성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 신의 거주처로서 혹은 신 그 자체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바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초월적인 존재는 조상의 영혼이나 새로 태어날 아이의 영혼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울주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걸쳐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의 흔적을 간직한 바위이다. 국보로 지정된 이곳은 해발 250m 정도의 얕은 능선 자락 아래에 병풍처럼 펼쳐진 장방형 대형 암면과 북편으로 이어진 여러 개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천전리 각석 앞으로는 대곡천이 흐르며 내 앞 너럭바위에 닿은 급경사 암벽이 1㎞ 정도 하류로 이어지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바위 절벽과 만난다. 천전리 각석 앞 대곡천 건너에 펼쳐진 너럭바위는 100여 명 이상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며 200여 개의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도 확인되고 있다.
동쪽으로 향한 천전리 각석의 바위 가운데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암면은 너비가 9.5m이고 높이 2.7m로서 대형이다. 좁은 의미의 천전리 각석은 이 바위를 가리키며 유적 전체의 한 부분으로 분류될 때는 주암면으로 부른다. 주암면은 대곡천을 향해 비스듬히 기운 상태여서 대곡천 건너 암벽 위로 해가 넘어가기 전의 짧은 일정한 시간 동안만 햇볕이 바르게 드는데, 주암면 하부에 새겨진 세선각화는 이때 자세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천전리 각석 주암면에는 모두 800여 개의 인물, 동물, 기하면, 명문, 도구 등 다양한 물상과 명문이 새겨져 있다. 1970년대 천전리 각석이 학계에 보고된 이래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각석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리가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이 왜 이곳에 와서, 무엇을 했으며, 무엇 때문에 바위에 여러 흔적을 남겼는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이다.
[풍요와 안정을 빌던 신성한 곳]
울주 천전리 각석을 감싸 안은 대곡천 계곡은 풍광이 장관을 이루며, 물길로 1㎞정도 내려가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이른다. 이곳은 신석기시대 말부터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암음(岩陰) 유적으로, 주로 수렵과 어로의 모습 등 150여 점이 넘는 그림이 있다. 천전리 각석이 위치한 곳 또한 울산항으로부터 육지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며 선사시대부터 풍요와 안정을 빌던 장소이자, 고유의 종교 의식이 행하여지거나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곳이었다.
천전리 각석에 표현된 800여 개의 물상 및 명문 가운데 주암면에 새겨진 것이 700개로, 전체 물상 및 명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명문으로 253개에 이르며 전체의 32%를 차지하지만, 이외 동물상이 226개(29%), 기하문이 93개(12%), 인물상이 61개(8%), 도구 및 기타에 속하는 것이 37개(5%)이고 형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없는 것도 107개(14%)에 이른다.
천전리 암각화 주암면 물상 및 명문의 중첩 관계로 확인되는 새김의 순서는 점찍듯이 바위를 쪼아내 형상을 드러낸 동물상과 인물상이 처음이고, 쪼고 긋고 갈아서 굵은 음각선을 남기는 방식으로 형상화한 기하문이 그 다음이다. 그리고 철필로 강하고 날카롭게 선을 그어 사람과 동물, 도구 등의 형상을 만들어 낸 세선각화, 긋고 쪼아내는 두 가지 방식을 혼용하거나 깊게 긋기만으로 인명, 지명, 일화 등을 남긴 명문은 선후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점각 동물, 선각 동물, 상상의 생물을 포괄하여 통계를 내면 천전리 암각화 주암면 물상에서 초식 동물이 121마리로 56%에 이르고 육식 동물은 26마리로 26%를 차지한다. 초식 동물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은 이런 종류의 동물들이 암각화 제작자들에게 먹거리를 위한 사냥 대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에 주암면에는 새, 물고기, 용 등이 묘사되었다. 천전리 암각화에서 깊게 갈아내기로 묘사된 기하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것은 마름모문이다. 전체 기하문의 반이 넘는 41점이 마름모문이다. 원문은 29점이며 물결을 나타내듯 지그재그 선으로 표현된 무늬는 10점, 분류가 어려운 무늬는 4점이다.
천전리 암각화의 세선각화는 대부분 주암면 하부에 넓게 펼쳐졌다. 주암면 하부 남쪽 끝의 중간쯤 뿔 달린 사슴과 정체를 알기 어려운 짐승의 무리가 묘사되어 있다. 이 짐승 무리의 아래에 사람과 말로 이루어진 세 무리가 잇달아 표현되었다. 남쪽 끝부터 사람과 말, 기마 인물이 무리를 이루며 약간씩 간격을 두고 그려졌다. 세 번째 무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돛이 달린 3척의 배가 묘사되었다. 화면의 등장인물이나 동물, 도구는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서사적이다. 세 번째 무리와 선단의 위쪽에 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용의 상반신이 커다랗게 묘사되었다. 이 용은 역사시대의 신화나 설화적 인식과 관련이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주암면 하부 중앙부에는 두 팔 두 다리를 활짝 핀 채 서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소용돌이치는 못, 용, 말 등이 새겨졌다. 못과 용 주변은 세선 구역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길고 짧은 세선이 수없이 그어졌는데, 세선의 중복이 매우 심해 형상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주암면 하부 북쪽에는 여러 척의 배, 용, 동물, 인물, 행렬 등이 표현되었다. 배가 묘사된 구역에도 세선이 다수 덧그어졌으나 중앙부와 같이 심하게 중첩되지는 않았다. 북쪽 끝 가까운 곳에 그려진 용은 머리, 몸통, 꼬리가 구분되고 몸의 비늘도 표현되어 있는데, 천전리 암각화에서 물상의 세부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사례이다.
천전리 암각화의 명문 역시 주암면 하부에서 주로 확인된다. 주암면 221개의 명문 가운데 현대의 낙서 3개를 제외한 218개, 1000여 자가 삼국시대의 신라 및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 가운데 이른 시기의 것은 453년(계사명(癸巳銘))작이며 가장 늦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838년(개성3년명(開成三年銘))작이다. 이외에도 연대 미상의 명문이 다수 있다.
특히 고대에는 무슨 일을 행하고 나면 소를 잡는데, 처음 천전리 계곡을 찾아 온 신라인들은 그들이 새긴 기록 중에 ‘식다살작공인(食多煞作功人)’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사람을 시켜 짐승을 잡았음을 전하고 있다. 이리저리 어긋나듯 자유로운 필체로 새겨진 천전리 각석에서 우리는 신라인의 나들이 장소, 형태, 목적 등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으며, 꿈을 향한 그들의 간절한 기원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구성된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으며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진솔한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자연을 탐닉한 신라인의 야유회]
사계절이 분명함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신록과 단풍은 꽃보다 더 찬란하다. 이러한 찬란함을 더 풍요롭게 누리고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아울러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마음껏 즐겼다. 특히 신라인들은 봄과 가을에 나들이를 즐겼다. 그들은 거주지에서 다소 떨어진 사영지(四靈地) 등 신성한 곳을 찾아가 회의를 하거나 화랑들은 심심산천을 찾아서 시를 짓고 자연의 풍류를 탐닉하였다. 신라인들은 산천을 두루 다니며 심신을 닦고 교류를 했는데, 이는 공동체 의식도 기르고 자연 지형에 대한 정보도 습득하며 신체를 단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주에서 가까운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서석곡은 신라인의 유명한 놀이터였다. 이곳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이 경주와 언양을 이어주는 고대 교통로이기도 하였다. 물줄기가 이 부분에서는 여러 차례 말발굽 모양으로 굽이쳐서 속칭 ‘구곡계(九谷溪)’라고도 불리는 경관이 빼어난 계곡이다. 계곡에 접하여 자리한 높이 2.7m, 폭 9.5m 크기에 다양한 문양과 그림 및 각종 명문이 새겨져 있는 암벽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엄숙한 분위기가 주위를 압도하므로 자유로운 유희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격식에 따른 일정한 의식이 행해진 성역(聖域)일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명문은 대체로 6세기 무렵에서부터 신라 말에 이르는 것까지 매우 다양한테 약 800여 자를 읽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당대에 이 장소가 지녔던 의미, 또 신라인들이 자연 속에서 찾고자 했던 들놀이의 형태를 살펴볼 수가 있다.
명문은 여러 가지가 새겨져 있는데, 기록 시기를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글은 눌지왕 37년(453) 혹은 지증왕 14년(513)에 작성된 계사명이다. 계사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癸巳六月卄二日 喙壹奮 王夫 … 奈 夫人輩衆大等 … 部書人小 … 思郞女□作 鄒?呑越?釋? 尒小知大兄加 豆篤知大兄加 宮頭辭 … 老岑邽?婁?
癸巳年(453년, 눌지왕 37년) 6월 22일 닭(부)의 일분 왕부…나(마) 부인배중대등…부서인소…사랑녀□작 추?탄월?석? 일소지 대형가와 두독지 대형가 궁두사…노잠규?루?
해당 내용은 선이 가늘고 글자가 큰 탓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이 명문에 개의치 않고 후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훼손되거나 삭제된 부분이 많으며 내용을 알기 힘들고, 이후에 나올 원명에서 입종갈문왕이 525년 방문했을 때 이름 없고 알려지지 않은 계곡이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그 이전의 계사년인 513년 혹은 453년으로 비정할 뿐이다. 구체적으로는 525년과 시간상 좀 더 떨어져 있는 453년으로 비정하며, 중간에 등장하는 대형가(大兄加)를 고구려 관등 대형大兄으로 받아들인다면 456년 장수왕의 백제 공격때 신라가 백제를 도운 것으로 고-신 사이가 틀어졌으므로 고구려 관등을 가진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려면 453년이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형(大兄)으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 관등이 대형가(大兄加)로 적힌 것은 이 명문에서만 발견된다는 가치가 있다.
그 이후로 신라 상대부터 통일신라 시기에 새겨진 것까지 여러 글귀가 여기저기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있는 원명(을사명)과 추명(기미명)이다. 원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 乙 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食?多煞作功?人尒利夫智大奈[5]… 悉得斯智大舍帝智▨作食…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 : 尒智大舍帝智
을사년(乙巳年)에 사탁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명문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妹)인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안랑왕(於史鄒安郞王)[6]이다. 식다살작공인(食多煞作功人)[7]은 이리부지(尒利夫智) 대나(마)와 실득사지(悉淂斯智) 대사제지이며, 밥을 지은 이는 영지지(榮知智) 일길간지의 아내 거지시해부인(居知尸奚夫人)과 진육지(眞宍智) 사간지의 아내 아혜모홍부인(阿兮牟弘夫人)이고, 글을 적은 이는 모모이지(慕慕尒智) 대사제지이다.
글자가 가장 빽빽히 써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둘 다 사각형을 치고[8] 그 안에 글자를 써 넣었다. 이 중 1차적으로는 '신라 법흥왕 12년에 사탁부를 다스리던 사부지 갈문왕과 그 누이 및 어사추안랑왕[9]을 비롯한 여럿이서 놀러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이곳에 글 새기기도 좋은 돌이 있어서 이 장소를 서석곡이라 짓고 여기다 방명록 새기고 가염~' 이라는 내용이다. 같이 온 사람들과 사냥을 즐긴 사람, 음식을 한 사람과 명문을 새긴 사람까지 모두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원래 새긴 것이라 하여 원명(原銘)이라고 한다.(출처 : 울산역사문화대전)
그 후 새긴 추명(追銘)은 1차 내용, 즉 원명을 새긴 것이 법흥왕 12년(525) 6월 18일 새벽이었으며 그 후 세월이 흘러 사부지 갈문왕과 당시 같이 놀러왔던 누이와 어사추안랑왕은 죽었고,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 사부지 갈문왕이 어린 삼맥종 등을 법흥왕 26년(539) 7월 3일에 데리고 왔다. 역시 이번에도 총책임자, 예를 드리러 온 사람, 음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추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安郎」三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支妃徙夫知王予郎深▨夫知共來 此?時▨」作功臣喙部知礼夫知沙干支▨泊六知」居伐干支礼臣丁乙尒知奈麻作食人眞」宍智波珎干支婦阿兮牟呼夫人尒夫知居伐干支婦」一利等次夫人居礼次▨干支婦沙爻功夫人分共作之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와 어사추안랑 셋 이 함께 놀러온 이후 ▨년이 지났다. 팔사년 지난 날 누이의 모습, 왕은 누이를 생각했다. 왕은 회상했다. 왕은 지난 정사년에 있었던 왕비 지몰시혜비를 사랑하여 스스로 생각했다. 기미년 7월 3일에 왕과 누이는 함께 서석을 보러 왔다. 계곡을 보러왔을 때 함께 셋이 왔는데, 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 사부지왕자랑과 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이 때 ▨작공신(▨作功臣)은 탁부(喙部) 지례부지(知礼夫知) 사간지와 ▨박육지(▨泊六知) 거벌간지이며, 예신(禮臣)은 정을이지(丁乙尒知) 나마이다. 밥을 지은 이는 진육지(眞宍知) 파진간지의 아내인 아혜모호부인(阿兮牟呼夫人)과 이부지(尒夫知) 거벌간지의 아내인 일리등차부인(一利等次夫人)과 거례차(居礼次) ▨간지(▨干支)의 아내인 사효공부인(沙爻功夫人)으로 나누어 함께 지었다.
이름을 단순히 나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의 누구, 누구의 부인 누구 라는 식으로 꽤 정확히 적어놓았는데, 다른 사료에 나오는 인명과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중에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사부지 갈문왕의 누이와 어사추안랑이 누구인지, 동일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법흥왕의 왕비, 갈문왕의 왕비인 지소태후가 추명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법흥왕과 사부지 갈문왕에게 여자형제가 있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명과 추명은 단순한 내용이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추명에서 법흥왕을 '모즉지태왕'으로 칭하는데 15년 전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모즉지 매금왕'이었던 것이 태왕으로 표기가 바뀐 것이다. 이를 법흥왕대의 왕권 강화책이 상당한 효과를 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아래는 2019년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연구보고서에서 밝힌 울산대학교 전호태 교수의 판독 및 해석이다. 내용이 조금 다르다.
아래는 을사명(원명)이다.
乙巳…沙喙部葛…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 乙 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多煞作功?人尒利夫智奈… 悉得斯智大舍帝智□作食…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 : 尒智大舍帝智
乙巳年(525년, 법흥왕 12년)~에 사닭부의 갈(문왕이신 사부지 갈)문왕께서 찾아 놀러 오셔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름이 없던 골짜기였는데, 좋은 돌을 얻어 쓸[書記] 수 있게 되니 이름 짓기를 書石谷이라 하시고 글자를 적게 하셨다. 함께 놀러온 友妹는 성스런 덕이 빛처럼 오묘하신[聖德光妙:여덕광묘] 於史鄒女郞王(어사추여랑왕)이시다. □多煞作□(功?)人은 尒利夫智奈(이리부지나)(麻와)悉得斯智大舍帝智이며, □作食(人은) □□智 壹?吉干支의 妻인 □(居?)知尸奚 夫(人과) □(眞?)宍智 沙干支의 妻인 阿丂?牟弘 夫人이다. 글을 쓴 사람[作書人]은 慕慕尒智 大舍帝智이다.
아래는 기미명(추명)이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善 部徙夫知葛文王王妹於史鄒女郞 王共遊來以後□□十八□□過□妹王考 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 天 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 叱見來谷此時共王來 另卽知太王妃夫乞? 夫 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此?時□ 作□□喙部□礼夫知□干支 □六知 仇良 居伐干支□乙□□知奈麻□食人眞 宍智波珎干支婦何□牟呼夫人□夫知居伐干支婦 □利等□夫人□□□□干支□沙□□夫人分共作之
지나간[過去] 乙巳年(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닭부(사탁부)의 徙夫知 葛文王(사부지 갈문왕)과 王妹(왕의 누이)인 於史鄒 女郞王(어사추 여랑왕)께서 함께 놀러 오신 이후 □□十八□□이 지나갔다 . 妹王(누이)을 생각하니 妹王(누이)는 돌아간 사람이라, 丁巳年(정사년,537, 법흥왕 24년)에는 王께서도 돌아가시니[過去] , 그 왕비인 只沒尸兮妃(지소태후)가 애달프게 그리워하시다가 己未年(기미년,539, 법흥왕 26년) 7월 3일에 그 왕과 누이가 함께 보고 글을 써놓은 돌을 보려고 골짜기에 오시었다. 이때 함께 여러 왕 오시니, 另卽知 太王(모즉지태왕)의 妃(비)인 夫乞?支妃(부걸지비)와 徙夫知王(사부지왕)의 子郞(자낭:아들)이신 深□夫知(심맥부지)께서 함께 오셨다. 이때 □作□□은 닭부의 □礼夫知 □干支와 □六知 居伐干支, □乙□□知 奈麻이며, □食人은 眞宍智 波珎干支의 婦인 何□牟呼 夫人과 □夫知 居伐干支의 婦인 □利等□ 夫人, □□□□干支의 □(婦)인 沙□□ 夫人이 나누어 함께 지었다.
위의 해석에 따르면 539년 기미년의 계곡에 다시 방문한 것은 사부지 갈문왕이 아닌 그 아내 지소태후이며, 또 어사추안랑은 왕의 친한 여동생이자 약혼녀가 아니라 어사추여랑왕이라는 이름의 그냥 왕의 누이일 뿐이다. 또 위의 해석처럼 입종 갈문왕이 이미 죽었다는 누이 거기에 더해 같이 온 사람이 보도부인, 사부지왕자, 심맥부지(진흥왕)의 별개 세 사람이 아니라, 三을 王으로 읽어 여러 왕들이 함께 왔는데 지소태후와 함께온 왕들이 보도부인과 사부지왕자(=심맥부지=진흥왕) 두 사람인 것이다. [16] 또한 입종갈문왕의 아내 지소태후는 입종갈문왕의 형의 딸, 그러니까 조카인데, 입종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고 보도부인은 법흥왕의 아내이니 지소태후는 보도부인의 딸이다. 또한 후대의 진흥왕은 사부지왕자로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니, 이는 지소태후의 아들이다. 즉 입종갈문왕이 (누나는 죽었다고 해도) 뜬금없이 자기 아들 그리고 형수랑 같이 오는 것보다는, 입종갈문왕의 아내 지소태후가 자기 남편 옛날에 놀러온 곳 둘러볼 겸 자기 아들 그리고 엄마를 데리고 왔다는 게 더 이치에 맞을 수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이던 우매어사추안랑왕지 인지 우매 어사추여랑삼지 인지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전호태 교수 외에도 강종훈 교수가 전자를 지지하고 이 경우 말이 통하는 부분이 많고 왕과 왕의 누이의 근친 로맨스까지 망상하게 되는(위의 다큐도 그러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해석이 있는 데 반해 여전히 사내 랑郞이 어째서 여자인 왕의 누이에게 붙었는지는 해석할 수 없다.
이상 원명과 추명은 사각형의 테두리를 그어놓고 매우 공들여 조각한 내용이고, 그 외 기타명이라고 하여 바위 이곳저곳에 엉망진창으로 새겨놓은 것들이 많은데 이 역시 대부분 화랑, 승려 등이 놀러와서 자기들 이름이나 메시지를 새겨놓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무오유월이일 영랑성업(戊午六月二日 永郞成業)으로 추정되는 기타명의 경우 무오년 6월 2일 영랑이 업적을 달성하다 라는 의미로 '영랑'이라는 화랑이 어떤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출처 : 나무위키)
[화랑의 도량]
신라의 전 시기를 통하여 가장 활발하게 산천으로 나선 그룹은 역시 화랑(花郞)들이다. 화랑제도는 청소년들의 원기발랄한 모임으로 이곳을 거친 인물들이 국가의 동량(棟樑)[기둥]이 되었고, 민족 통일 전쟁에 기여했다. 또 그들은 골품 사회에서 계층 간의 긴장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들의 훈련 방법은 함께 무리를 지어 서로 도의를 연마하며 노래하고 산수를 찾아다니며 같이 즐기는 것이었다. 화랑들은 효종랑의 무리처럼 남산 등 경주 인근에서 자주 모였다. 천전리 각석에는 영랑, 금랑, 정광랑 등 신라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도읍인 서라벌에서 가까운 이곳 천전리 계곡까지 찾아와 도량으로 삼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하대로 내려오면서 승려 귀족들이 놀러 왔다가 이름과 그들의 사연을 새기고 갔다.
한편 천전리 각석에 등장한 영랑은 술랑, 남랑, 안상과 함께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봉우리의 북쪽 벼랑 벽에 단서(丹書)로 ‘영랑도석남행(永郞徒石南行)’이라고 새겼다. 화랑들이 멀리 떠날 때 주로 향하던 곳은 동해안과 금강산으로 특히 강원도 통천 지역이었다. 화랑들은 대체적으로 네 명이 짝을 지어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고려 이후 조선까지 사선(四仙)으로도 불리어졌던 것 같다.
이러한 순례는 공동체 훈련, 국토애의 함양, 지리 익히기를 목적으로 하였을 것이다. 화랑을 비롯한 신라의 유식자들은 흔히 여행한 장소의 큰 바위나 눈에 띠는 절벽 등에 자신들의 이름이나 바램이 담긴 글월을 남긴 점은 주목된다. 천년이 지난 오늘날 천전리 각석과 같이 그들이 남긴 몇몇 글자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초월적인 존재인 자연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간절한 바람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출처 : 울산역사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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