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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팔공산

송림사

노촌魯村 2006. 3. 7. 18:32

 

송림사(위의 사진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송림사(위의 사진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송림사 당간지주 

송림사 당간지주(2009년 봄)

 대웅전

  

 

 

 대웅전(2009년 봄)

 대웅전 현판 (숙종의 어필이라고 전함) 

대웅전 측면  

송림사 대웅전 불상 

송림사 대웅전 보살상

 송림사 대웅전 보살상

 대웅전 꽃 문살  

삼천불전 

     송림사 극락전 석조 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보물 제 1606호(09.03.05 보물로 승격)

송림사 극락전에 봉안된 미타삼존상으로 본존에서 발견된 복장조성기에 따라 순치 12년(1655)의 정확한 연기를 지닌 상이다. 현재는 두터운 개금과 후대 보수로 인해 세부적인 분석은 어렵지만 대체로 조선후기의 안정된 구도를 보이는 상이다. 본존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다소 약한 듯 하고 다리 앞으로 부채꼴 주름이 길고 높은 편이다. 불두는 육계표현은 없으나 정상육계, 중간육계가 있고 나발로 덮었다. 어깨도 약하게 각진 형태에 오른어깨로 대의 자락이 걸친 통견이다. 내의는 가슴 아래에 굵은 띠로 표현되었고 띠매듭은 없다. 양손은 다리에 얹어 촉지인을 하고 있다. 좌우 협시의 양식도 본존과 흡사해서 민머리의 지장보살 불두가 본존의 불두와 흡사하다. 석조의 대작에 속하므로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에서 기준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림사 석등(2009년 봄)

 

명부전

 

명부전(2009년 봄)  

명부전 지장보살(2009년 봄) 

 

 

 명부전 벽화

 

 

 

 

 

 

 

 

 

 

 명부전 벽화(2009년 봄)

 

 

 

 

 

 

 

 

 

 

 

 

 산령각

 대웅전 축대의 안상문

 송림사 오층전탑

 

송림사 오층전탑(2009년 봄)

송림사 오층전탑 상륜부(2009년 봄) 

국가지정 보물 제189호(1963. 1.21)로 지정되었으며 9세기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전탑(塼塔)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전탑은 신라와 고려초기의 것으로 모두 5기에 불과한데 그마저 온전한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 탑뿐이며 특히 상륜부까지 남아있어 보물로 지정된 아주 희귀한 문화재이다. 전탑에 쓰인 벽돌은 점토를 방형 또는 장방향으로 빚어서 말린 다음 가마에서 섭씨 800∼1000도로 구워낸 것이며 지상 1m정도의 화강암기단(花崗岩基壇)위에 벽돌로 5층의 탑신을 쌓았으며 그 위에 4.5m 높이의 청동으로 만든 상륜부가 있어 전체높이는 석가탑보다 4m정도 높은 16.13m이다. 탑신은 한변이 27㎝이고 높이가 6.2㎝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방형전(方形塼:네모반듯한 모양)과 장방형전(長方形塼:반으로 나눔)으로 이중으로 쌓아 올렸다. 옥개부의 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게 만들어 탑의 안정감을 더해주고 옥개부의 아랫부분인 받침은 9.7.7.6.4단으로 윗부분인 낙수면은 11.9.8.7.5단으로 각각 줄어든다. 상륜부(上輪部)에는 청동제 복발(覆鉢:불탑의 탑머리에서 노반위에 놓이는 장식으로 사발을 엎어놓은 모습), 앙화(仰花:탑 상륜부의 복발위에 설치하는 연꽃모양의 장식물), 보륜(寶輪:불탑의 탑머리에 앙화와 보개사이에 놓이는 장식물),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동판(銅板)으로 싼 목심찰주(木心擦柱)에 꽂혀 있으며 상륜부를 받치고 있는 탑의 덮개 네 모서리는 풍경이 달려 있다. 1959년 해체 복원시 목불상(木佛像)과 사리장치(舍利裝置)등이 발견된 바 보물 제325호로 일괄 지정되어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금동제사리탑 - 2층 탑신에서 발견된 것들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사리 장신구로 거북 모양의 돌로 만든 함안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14.2㎝로 기단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지붕을 덮고 있는 탑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 아래는 연꽃잎을 두르고 그 위에는 난간을 세웠다. 기단의 중앙에는 6개의 꽃잎을 깔아서 유리잔을 받칠수 있게 만들었으며 지붕아래 처마에는 삼각형의 장식을 14개씩 옆으로 줄지어 붙이고 4귀퉁이에는 기단까지 닿게 아래로 길게 원형장식을 매달은 금줄을 늘어 뜨렸다. 2층으로 된 지붕에는 마름모 모양을 뚫어서 모양을 냈으며 금으로 나뭇잎을 만들어 장식하였다. 모든 장식들은 금판을 얇게 오려 점을 찍거나 가공하여 하나하나 못으로 섬세하게 고정시켰다.

 

* 녹색유리배 - 2층 탑신에서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탑 형태의 금동사리기가 있었으며, 사리기 중앙에 이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높이 7㎝, 아가리 지름 8.7㎝로 녹색의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밑에 받침이 있고 위가 넓은 컵모양을 하고 있다. 표면에는 지름 1.3㎝내외의 고리 모양의 장식이 12개 붙어있고 안쪽 중앙에는 옥을, 그 주위에는 진주를 붙여 장식하였다.

* 녹색유리제사리병 - 2층 탑신에서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탑 형태의 금동사리기가 있었으며, 이 녹색의 투명 유리병은 금동사리기 중앙에 놓여있던 컵모양의 유리잔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높이 6.3㎝, 배지름 3.1㎝로 황갈색이 도는 녹색의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배가 부르고 목이 긴 형태를 하고 있다. 짙은 녹색의 보석형태를 한 마개가 달려있다.

* 금은제수형장신구 - 2층 탑신에서 금동사리탑과 함께 거북 모양의 석함안에서 되었는데 높이 18㎝로 보리수 모양을 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공예품이다. 밑이 뾰족한 뿌리위에 좌우 대칭으로 뻗은 가지를 새긴 은판을 나무모양으로 접어 만들고 금으로 도금하였다. 보리수 형태로 된 가지에는 200여개의 원형장식들이 달려있다.

* 금동제원윤 - 이 원륜은 탑의 5층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 가운데 복발안에서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원합과 함께 나왔다. 지름 3㎝, 두께 7.5㎝로 안쪽바닥에 2개가 나란히 포개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양쪽면에는 중앙점에서 출발하여 점점 크기가 커지는 동심원이 그려져 있다.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것이 경주 분황사석탑(국보제30호)에서도 발견되었다.

* 옥류 - 이 탑에서 발견된 옥은 단단한 경옥(1)과 모양이 굽어있는 굽은 옥(2) 3점을 비롯하여 녹청색, 청색, 암갈색등 반투명 혹은 불투명한 유리원옥이 있다. 큰 것 28개, 작은 것 238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수정능옥 8개, 윤이 나고 고운 차돌의 일종인 마노단옥 1개, 길이 2㎝의 벽옥관옥 4개 등으로 일부는 파손된 것도 있다.

* 은환 - 은으로 만든 지름 1∼2㎝의 반지로 생각되는 고리이다. 지름 2㎜정도의 은선을 말아서 만들었는데, 그 중 2줄로 된것도 있으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 향목 -  불교에서 향은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가 있어 기도할 때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이다. 이 탑에서 나온 향목은 정향과 침향 2종류로 모두 7개이다.

* 목실 - 이 탑에서 나온 나무의 열매로 1,500여년전의 실제 보리수 열매로 보인다.

* 상감청자원형합 - 이것은 탑의 5층 지붕돌위의 머리장식 가운데 복발안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7.8㎝, 지름 18㎝로 뚜껑 가운데에는 국화를 그 주변에는 꽃들을, 나머지 다른 부분에는 사각문양을 상감기법으로 새긴 것으로 안에 물건을 담을 수 있게 만든 합이다. 표면의 유약 색깔과 문양으로 미루어 12세기 후반 상감청자의 전성기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다(칠곡군 자료에서)

 

 전탑에서 나온 사리석함(위 부분은 현재 도난 당함)

사리석함(위 부분이 도난되고 다시 만든 복사품임)

 

기성대사 행적비와 부도군 

 

   기성대사 비명 

 

 

 

송림사의 전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성한 자그마한 야산에 화려한 상여 하나가 들어서고 있었다. 관이 땅에 내려지자 상주들의 곡성이 더욱 높아졌다. 모두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유독 맏상주만이 두 눈을 번득이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슬픈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그를 지켜보며 마을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맏상주가 그들을 향해 던진 말은 더욱 걸작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오늘 장례식에서는 떡 한쪽 술 한잔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끼줄 한 뼘 거적 한 장도 가져갈 수 없으니 그리 아십시오. 대신 일꾼 여러분께는 품삯을 장례식이 끝난 후 곱절로 드리겠습니다.”
곡도 하지 않고 두리번거리기만 하던 상주가 당연히 나눠먹어야 할 음식을 줄 수 없다는 까닭 모를 말을 하자 주위는 더욱 술렁거렸다. 그렇게 말을 던져놓고도 맏상주는 여전히 불안해 했다. 맏상주는 어젯밤 꿈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돌아가신 부친 곁에서 이틀 밤을 꼬박 세운 그였는지라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 백발노인 한 분이 다가와 묘 자리로 봐둔 산을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는 명심하여 듣도록 하여라. 그대의 부친 묘 자리는 길흉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내가 이르는 대로 하지 않으면 집안이 패가망신을 면할 수 없느니라.”
이 말을 들은 그는 깜짝 놀라 노인을 붙들고 그 방도를 일러달라고 애원했다.
“좀 어려운 일이긴 하다만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술과 음식을 누구에게도 주어선 안된다. 뿐만 아니라 새끼줄 한 토막이라도 적선할 경우 가세가 기울어짐은 물론이거니와 대가 끊길 수도 있느니라.”
놀라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그저 꿈이려니 생각하고 넘기기엔 왠지 불안감이 앞섰다. 묘 자리 하나에 집안의 흥망이 달렸으니 그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하나 영문을 알 수 없는 마을사람들로서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계속 삽질을 했다.
무덤의 봉분이 어느 정도 오를 무렵 걸인 한 떼가 몰려왔다. 마을 잔치집이나 초상집에 빠지지 않는 불청객이 그들이지만, 그날만큼은 푸짐하게 얻어먹곤 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그들조차 굶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바탕 악담을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세상에 막걸리 한 잔 없는 장례식도 다 있는가. 그 놈의 집구석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
그래도 맏상주는 못 들은 체 했다. 혹시나 걸인들이 행패나 부리지 않을까, 음식을 건드리지나 않을까 그것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지 가져온 음식들을 챙겨 집으로 가져가 단단히 지킬 것을 일러두었다.
음식을 집으로 보내놓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집으로 보낸 음식을 남은 음식으로 알고 먹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에 더는 참지 못하고 일꾼들에게 당부의 말을 거듭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품삯은 모두 세 곱으로 셈해서 드릴테니 묘를 다 씌운 후에는 거적과 새끼줄·지푸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모두 태워주시오. 꼭 부탁하오.”
맏상주가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낙과 걸인들이 음식을 두고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맏상주는 미친 듯이 두 팔을 내저으며 그들을 쫓아보냈다.
산에는 묘가 다되어 상주의 부탁도 있고 해서 새끼줄과 흩어진 거적들을 모아 태우기 시작했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지소년 하나가 덜덜 떨며 불가로 다가왔다. 일꾼 하나가 맏상주의 당부가 생각나 소년을 밀쳐내자 소년이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이 측은해 하며 소년을 위로하자 소년은 더욱 큰 소리로 울어대며 타다 남은 거적 한 장을 달라고 했다.
“아저씨, 추워 죽겠어요. 거적 하나만 주세요.”
없는 사람들의 심정은 가난한 이들이 더 잘 알듯이 그들은 맏상주의 부탁도 잊고 거적 한 장을 거지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얼른 갖고 이곳을 떠나거라. 누구 눈에 띄면 안 된다.”
거적을 뒤집어 쓴 소년은 쏜살같이 숲 속으로 달아났다. 일꾼들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연장을 챙겨 막 산을 내려오는 데 방금 소년이 뛰어들어간 소나무 숲에서 꽝하는 굉음과 함께 절 한 채가 우뚝 솟아났다. 일꾼들은 한편으론 경이로움을, 한편으론 두려움을 느끼며 뒷걸음쳐 산을 한달음에 내려왔다.
이상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정말로 백발 노인의 말대로 그 날 묘를 쓴 집안은 점차 가세가 기울어지고 거지에게 거적 한 장을 건네준 일꾼들의 집은 차차 형편이 나아지는가 싶더니 부자가 되었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소나무 숲에서 솟아난 절을 송림사(松林寺)라 부르고 가난한 이웃에게 선행한 업보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고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았다.
정사(正史)에 따르면,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가산(架山) 남쪽기슭 팔공산 초입에 위치한 송림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진(陳)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화상이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1092년(고려 선종 9)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창했으나, 1243년(고려 고종 30) 몽고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조선 세종 때는 교종·선종 36사 중 하나가 될 정도로 번성했으나, 1597년(조선 선조30) 왜병들의 방화로 소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1686년(조선 숙종12)에 기성대사가 중창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동쪽 약 50m지점 도로변에는 기성대사를 기리는 높이 2m의 비석과 부도 4기가 있다. 또한 대웅전 앞에는 신라시대 전형적인 벽돌탑인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189호)이 있다. 1959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순금제 불감(佛龕) 및 옥과 금으로 된 보리수 형태의 공예품과 불사리 4과가 나왔다.

 

송림사의 구부러진 5층전탑의 상륜부

송림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5층전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탑 속의 보물과 사리 등을 약탈하려고 들어 닥쳤다. 스님이 괘(卦)를 보니 ‘송(宋)자’를 무서워 할 것으로 나와 왜적들이 탑 윗부분 상륜부에 밧줄을 걸어 당기는 순간 ‘송림사’하고 소리치자, 청천백일에 뇌성이 일고 탑 속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왜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륜부가 구부러졌다고 한다. 지금은 상륜부가 수리되어 바로 서있다.(경상북도 : 전설과 함께하는 경북관광)

한국의 전탑여행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3.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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