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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낭산

노촌魯村 2007. 3. 27. 09:33

 

 

 남산에서 본 낭산

 

 경주 낭산

사적 제163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남북으로 길게 마치 누에고치처럼 누워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는 이 낭산은 신라 실성왕 12년(413) 8월 산에 구름이 일어나 누각과 같이 보이면 향기가 매우 짙게 퍼져 오랫동안 계속 됐다. 이것은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는 것으로 여기고, 이때부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했고, 성역으로 보존 받아왔다.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능을 비롯해서 사천왕사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바위에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많은 신라 유적이 있다.(문화재관리국)  

 목탑지(배반동)

 

구황동 목탑(경주시 구황동 482번지)

경주 낭산의 서북쪽에 1965년 신라문화동인회에서 발견한 목탑지가 있다. 목탑지는 높이 약 1m, 1변이 약 12m의 평탄한 방형 토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상부를 8각형으로 다듬은 심초석을 놓았다. 심초석은 상면에 연화문을 장식하고, 가운데 너비 27cm, 깊이 5cm의 방형 턱과 그 안에 지름 17cm, 깊이 23cm의 사리공을 두었다. 이 목탑지를 발견할 당시에는 석등대석과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비되어 흔적이 없다.(慶州市史3)

 목탑지의 심초석

 목탑지의 석재

 

 

 낭산에서 본 진평왕릉

 능지탑

 

능지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려왔는데 이 주변에서는 문무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내에 고문 밖 뜰에서 화장하라”하고 “상례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이곳이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에 이웃한 자리인 것으로 보아 문무대왕의 화장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초에는 사방에 소조대불을 모시고 감실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기단 사방에 12지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린 오층석탑으로 추정된다.(문화재관리국)

 능지탑의 십이지상(양)

신라.천년을 이어온 고도 경주(땅위에 새겨진 불교의 세계):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6.jsp

 중생사 마애 삼존상

 

 낭산 마애삼존불

보물 제665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경주 낭산의 서록에 해당되는 이곳에 조각된 마애삼존불은 비록 바위면이 박리가 심해 파손되었으나, 본존상은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스님의 복장에 가까운 법의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어 마치 고려 불화에 보이고 있는 피모지장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러한 양식의 앞선 예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본존불은 지장보살상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좌우에 함께 조각된 신장상은 병장기를 들고 있는 무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신라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전하는 능지탑이 가까이 있는 점과 조각 수법 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문화재관리국)

 마애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원래 장소 중생사 부근, 현재 경주박물관)

 문무왕비편(낭산 서쪽에서 발견)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조가 한(漢) 무제를 가장 측근에서 보필했던 '투후(秺侯)' 김일제(BC134~86)의 7세손 성한왕(星漢王)이라 적혀 있다. 김일제란 인물은 한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로 후에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았고 무제 사후에 '투후'라는 후작을 받은 이니 신라왕족이 흉노의 일파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는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명랑법사의 발원으로 세운 사찰이다. 이곳 일대는 사천왕사를 짓기 전부터 신유림이라 하여 신성하게 여겨왔던 곳인데, 신라 선덕여왕이 죽기 전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 달라” 고 했는데, 도리천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꼭대기 즉 사천왕 위에 있는 부처님의 세계인데 어떻게 인간이 그곳에 무덤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여왕이 “낭산 기슭이 바로 도리천이다” 라고 알려주자 그 말을 좇아 이곳 낭산 기슭에 여왕의 능을 만들었다. 선덕여왕이 죽은 지 31년 후에 이르러 왕릉 아래 인 이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게 되었으니, 여왕의 예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이 절은 삼국 통일 후 신라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의 세력을 막아내고자 한 호국의 염원으로 세운 절이었으나 지금은 금당터, 목탑터, 거북형의 비석받침대, 당간지주 등만 남아 있고, 더구나 일제 시대의 철로개설로 유적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다.(문화재관리국)

사천왕사지 목탑 심초석 

사천왕사 목탑(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사천왕사지는 낭산 남쪽에 있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토벌하려 함에 당시 당에 가 있던 의상대사가 문무왕 15년(675)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명랑법사로 하여금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병사를 물리치게 하였다는 절이다. 현재 이곳에는 당간지주, 금당지, 동서목탑지, 좌우 경루, 석조 귀부 등이 남아 있다. 동.서탑지에는 높이 약 130cm의 토단을 형성하고, 그 중앙에 118cm 너비의 심초석이 있는데, 그 중앙에 2단 턱의 방형공이 파여 있다. 상부의 홈은 찰주공 혹은 사리공의 개석이고, 아래 홈은 사리공으로 짐작되고 있다. 심초석 주변에 남아 있는 초석의 배치로 보면 목탑은 전면과 측면이 각 3칸이고, 1변의 길이가 약 650cm 였음을 짐작케 한다. 금당 앞에 1기의 탑을 세우는 삼국시대의 양식에서, 통일기에 들어오면 동서로 쌍탑을 세우는 양식으로 변모하는데, 사천왕사가 그 최초의 사찰이라 보고 있다.(慶州市史3)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상

 사천왕사지 귀부(서)

 사천왕사지 귀부(동)

 

 선덕여왕릉

 

신라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부문동

 이 능은 신라 선덕여왕(632~647)의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장녀로 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분이다. 재위 16년 간 후일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 명장 김유신과 같은 영걸을 거느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았으며 분황사, 첨성대 등을 세웠고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건축의 금자탑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곳에 능을 만든 것은 여왕의 유언에 따라 도리천에 장사 지낸 것으로 후대인 문무왕 때 능 아래로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됨으로써 여왕의 예언이 증명되기도 했다. 이 능의 밑둘레는 73m에 달하는 원형 봉토분으로서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를 2단으로 쌓아 보호석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문화재관리국)

 

善德女王과 도利天 <三國遺事 善德王知幾三事에서 옮김>

王無羔時 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도利天中 群臣罔知其處 秦云 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虎(武)大王創 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 有도利天.

 

왕이 병도 없었을 때인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에 장사 지내라.”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었다. “어느 곳입니까?”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의 남쪽이다.”하였다.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과연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다 장사지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 하였다.

신라. 천년을 이어온 고도 경주(경주의 고분을 찾아서)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6.jsp


 선덕여왕릉 앞 쪽 고분

 

 선덕여왕릉의 앞 쪽 고분의 폐탑재 

 선덕여왕릉의 앞쪽 고분

 황복사지 삼층석탑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 제3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이 탑은 이중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943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하였을 때 제2층 옥개석 내에 있었던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 속에서 금으로 만든 여래입상, 많은 유리구슬, 팔찌, 금실 등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사리함 뚜껑 내면엣 새겨둔 글자가 있어 이 탑에 대한 내용과 발견된 유물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이탑은 신라 신문왕이 그 11년(691)에 돌아가자 그의 아들 효소왕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이듬해(692)에 세웠으며 효소왕이 돌아가자 성덕왕이 그 5년(706)에 앞서의 두 왕을 위해 사리, 불상 등을 다시 넣고 아울러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세를 기원한 것이다. 탑의 상륜부는 없어졌다. 높이는 7.3m이다.(문화재관리국)

석조문화재를 찾아서(석탑여행.삼국 통일신라시대)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3.jsp 

 

 황복사지의 12지상(현재 땅속에 묻혔있음)

 황복사지 귀부

 황복사지 귀부

 황복사지의 석재

 황복사지의 폐우물

 황복사지의 당간지주

 황복사지의 동쪽 폐고분

 낭산에서 본 신문왕릉

 고운 최치원선생이 공부한 독서당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낭산 출토)

 

신라. 천년을 이어온 고도 경주(땅위에 새겨진 불교의 세계)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6.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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