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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건봉사

노촌魯村 2008. 8. 18. 12:02

 건봉사 불이문




건봉사불이문(乾鳳寺不二門.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건봉사 절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불이문은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는 문이다. 건봉사터에 남아 있는 불이문은 1920년에 세운 것이다. 불이문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각각의 기둥에는 금강저 문양을 새겨 놓았으며 앞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이었던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불이문의 주변에는 ‘나무아미타불석주’, ‘능파교비’등을 세웠다. (문화재청 자료)

 

 

 불이문의 금강저

고성건봉사지(高城乾鳳寺址.강원도 기념물 제51호.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건봉사는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신라 법흥왕 7년(520) 때 아도화상이 지은 절이다. 처음에는 ‘원각사’라고 불렀으나, 이 절의 서쪽에 새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어 건(乾)과 봉(鳳)을 합쳐 ‘건봉사’로 바뀌게 되었다. 경덕왕 17년(758)에 발징화상이 고쳐 지었고,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다시 고쳤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집하였는데 모두 6,000여 명이 모여서 왜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불타 지금은 옛 절터만 남아있다.(문화재청 자료)

 

 


 

 

 적멸보궁

 





 적멸보궁의 사리탑

 독성각

 산신각

 

 건봉사의 다람쥐

 건봉사의 건물터

고성 건봉사 능파교(高城 乾鳳寺 凌波橋.보물 제1336호.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1)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라 이름하였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웅전

 대웅전 내부


 명부전

 명부전 내부

 사명당의 기념관


사명당 동상


건봉사의 모형

사명당

건봉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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