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

노촌魯村 2009. 6. 7. 13:10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목우 백기만 시비

시인. 호는 목우(牧牛), 필명 백웅(白熊)·흰곰. 대구 출생. 대구고등보통학교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공부하였다. 양주동(梁柱東)·이장희(李章熙) 등과 문예지 《금성(金星)》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 1월 《금성》 창간호에 <청개고리>를 발표하고 《개벽(開闢)》 등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상화(李相和)와 함께 대구에서 3·1운동 당시 시위를 주도하는 등 항일저항활동을 하였다. 이상화가 죽은 뒤 상화시비(尙火詩碑) 건립에 앞장섰고,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尙火)와 고월(古月)》 《씨뿌린 사람들》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신선한 감각과 신비주의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산문적 호흡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작은 《은행나무 그늘》 등이다.

차차 이 집 저 집 처마에
原始的 초롱이 내어 걸린다

그리고 울도 없는 집 마당
에는 늙은이들이

끝없는 談笑에 즐거워한다

아아 平和롭도다 오직 太古靜
이 흐를 뿐이다

욕심도 없고 미움도 없고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産村은 山과 함께 어둠에
잠기려 하도다
 


 만포(晩圃)崔 穰海 선생은 1897년 음력 8월 23일 경주시 송곡동 43번지에서 부 최현일, 모 김 석촌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니. 孤雲 최치원의 29세 손이요, 가선대부 호조참판 최치덕의 6세 손이라. 선생은 유년시절부터 한학을 배워 사서오경을 통달했으며 숭조정신이 투철하였다. 1940년 23세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倭警의 추적을 받아 피신해 오던 중 1940년 44세 때 창씨개명반대를 위해 집에 갔다가 체포되어 경주 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문중에서 출옥토록 탄원하여 석방되었다. 1945년 조국 광복후 대구에 거주하면서부터 대구.영남 시우회 활동을 활발히 하여 아름다운 대구 풍광을 노래 하였으니, 별세하기 전까지 한시 260여 수 중 대구를 소재로 한 시를 100여 수나 남겼다. 1958년 62세 때 고운 최치원의 경학대장을 현토케하고 발간하여 전국 도서관, 유림등에 발표하였으니.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후학의 경학 전수에 힘썼다. 1961년 65세 때 영남 시단 한시 예시에서의 1등 당선을 계기로 전국 한시회 및 유림등에서 활약하여 대구를 빛낸 공적이 크며, 1967년 71세 때 계원필경집과 경학대전을 합본 발간하여 학문연구자료로 제공하였다. 선생은 일생동안 한시 창작과 경학 전수에 힘쓰다가 1978년 9월 21일 82세로 대구시 남구 봉덕동 219번지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22년! 대구가 낳은 한학자요 한시 대가였던 선생의 학문과 시 연구가 학계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이 때, 선생을 기리는 이들의 뜻을 모아 여기 인물동산에 선생의 한시 한 수를 돌에 새겨 선생의 대구사랑 정신을 길이 이어 받고자 한다.
2001년 6월 23일

 

 

 

 고월 이장희(1900-1929) 시비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 소이다" ."하일소경" 등

    29세 때 자살

 상화 李 相和시인은 1901년 음력 4월 5일 父親 경주 이씨 又南 李時雨와 母親 김해 김씨 金 신자의 四兄第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상화 시인 일곱살 때 별세 慈堂의 사랑으로 유복하게 자랐다. 상화의 철저한 抗日.排日 사상은 伯父 李一雨와 모친의 가르침이 컸다. 1919년 3월 중학생이었던 상화는 白基萬과 함께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 사건과 장진홍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에 관련되 투옥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22년 白潮同人으로 백조에 18세 때 작품인 나의 침실로를 발표 근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1926년 開闢에 발표한 민족의 비애와 강력한 항일 저항의식에 바탕한 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가슴깊이 남아있게 한다. 1928.9년 純宗임금 來邱기념恩賜館인 민단소내 노동야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쳤으며 당시 거듭되는 가택수색으로 談交莊 천정에 숨겨둔 古月 李章熙의 遺稿와 상화의 많은 원고가 압수 소각된 것은 우리 문단의 큰 손실이요 통탄함이 아닐 수 없다. 嶠南(교남)학교에서 1940년 까지 3년간 교편을 잡았던 그는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권투부를 창설 지도하기도 했다. 1943년 음력 3월 21일 조국광복을 못 본채 모진 고난의 휴우증으로 독립의 한을 안고 애통하게 永眠했다. 1948년 竹筍시인회가 주축이 되어 문단최초의 尙火시비가 달성공원에 세워졌고 한국방송공사 대구 방송총국과 한국 예총 대구시지회의 공동 주최로 향토문화 예술인들이 합심하여 그의 동상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1995년 8월 15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월간 『개벽』1926년 발표

 서양화가 이인성(1912-1950) 화백상

  2003년 문화인물 선정, 한국전쟁 당시 피살.

빙허 현진건(玄鎭建 1900-1943)

현진건은 대구에서 태어나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가이다. 그가 치욕의 일제 치하에 살면서 극명하게 묘사한 현실은 그대로 조선의 얼굴이었다. 생애를 통하여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지조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여기 비를 세운다.

 운영 조기홍(1883-1945)지사상

 

애국지사 박희광(1902-1970) 경북 구미에서 출생. 여덟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중국 만주땅으로 망명.

 1919년 약관 18세의 나이로 분연히 일어서 대한 독립군 통의부에 입대하여 여섯 해 동안 무장전투원 심양(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  이등박문의 수양녀인 배정자를 암살 실패. 1924년 6월 1일 일본경찰의 악질 밀정 정갑주를 겨레의 이름으로 처단. 그 달 7일 일진회의 주동자인 민족반역자 최정규를 찾아 권총으로 쏘았다.  침략자의 우두머리들이 드나들던 요정(금정관)을 급습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하던 중 적군과 마주쳐 총격전이 벌어져 불행하게도 현장에서 피체. 관동청 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형을 언도받고 20여년간 옥고의 악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끝끝내 조직의 비밀 유지.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

 동상 앞면의 글씨는 고 박정히 대통령의 친필휘호이며, 1997년 8월 15일 달서구 두류동 산 154번지 두류공원 내 인물동산에 흉상이 세워졌다.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大邱師範學生獨立運動紀念塔)
 1941년 2월 대구사범학교재학생 박효준 등 35명이 항일결사 모임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데 대한 공훈을 기리고 옥중 순국한 강두안·박제민·박찬웅·서민구·장세화 등 5인에 대한 추모를 위하여 건립하였다.

 

 

 

'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고택  (0) 2009.06.24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0) 2009.06.18
두류산 금용사  (0) 2009.06.06
읍내동(안양동) 마애불  (0) 2009.04.21
백촌 김문기선생 유적비와 태충각  (0) 200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