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산천단(濟州 山川壇.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예로부터 제주도에 부임하는 목사가 오면 2월에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냈는데, 날씨가 춥고 길이 험해 그때 마다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이 얼어 죽거나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발생하였다. 1470년(성종 1) 목사 이약동이 부임하여 이런 사실을 알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산신제를 지내게 하였다. 목사 이약동이 세운 기적비가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8그루의 곰솔이 제단 주위에 자생하고 있다. 삼도2동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5.16도로를 따라 가면 관음교 근처 삼거리 소산봉 아래에 있다.
노촌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년)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26세 때인 1442년(세종 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사첨시직장을 거쳐 1454년(단종 2년)감찰 황간 현감, 1458년 지평을 거쳐 선전관, 종부시정, 귀성부사, 제주목사등을 지내고 1474년(성종 5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천추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후 경주부윤, 호조참판, 첨지중추부사,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좌윤, 이조참판, 개성유수등을 역임하고 1491년 지중추부사로 벼슬 길에서 물러났다. 73세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말년에 고향인 하로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평정(平訂)이다. 그는 76세에 낙향할 때 비가 새는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고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 그는 유산으로 아들에게 아래 시(詩) 한 수를, 부인에게는 쪽박 하나와 질그릇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家貧無物得支分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
惟有簞瓢老瓦盆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뿐일세
珠玉滿籯隨手散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不如淸白付兒孫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이곳에는 본래 왼쪽에 한라산토지지신을 위한 제단이 있고, 오른쪽에 한라산신을 위한 제단이 놓여 있었는데, 최근에 이약동 목사의 후손들이 그 가운데 새로이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런 뒤 새 제단을 한라산신제단으로 삼고, 그 왼쪽에 따로 상을 차려 한라산토지신단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는 소림천(小林泉)이라는 샘물이 있고, 소림사(小林寺)라는 옛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8그루의 곰솔이 제단 주위에 자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