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집 나무( 보호수.회화나무)
최흥원 정려각(崔興遠旌閭閣. 문화재자료 제40호 (대구 동구).대구 동구 둔산동 375)
百弗庵 崔興遠(1705-1786)은 경주최씨 匡靖公派 鄲을 중시조로 하고, 현재 둔산동 옻골에 입향한 臺巖 崔東 집(1586-1622)의 후손이다. 百弗庵 崔興遠은 字를 太初·汝浩라 하였고, 初號를 數咎庵이라 하였다가 말년에 百弗庵이라 하였는데, 조선후기 영남의 대학자로 후에 漆溪선생이라 하였다. 백불암은 학문을 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한 것이 부인동 향약을 10여년 넘는 동안 실시하였고, 先公庫, 恤貧庫를 설치하여 동민들을 승화시키고 생활안정을 도모하였다. 백불암이 향약은 大山 李象靖(1710-1781)과 南野 朴遜慶(1713-1782)과 더불어 ‘嶺南三老’로 추앙되고 있던 학문적 명성과 더불어 朝野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교관이 되었고, 1782년(정조 6) 정악원 주부를 거쳐 1784년(정조 8)에 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사망한 뒤 그의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1789년(정조 13) 효행으로 정려를 명하였다. 1790년(정조 14)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백불암의 학문은 퇴계학파 속에서 躬行實踐學으로서의 위치를 가지며, 이 같은 실천은 가정과 학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향약의 실시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구체화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백불암의 학문과 향약을 당시의 선비들은 ‘大孝의 실천’, 또는 ‘經濟의 大綱’ 등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친의 병한 중에도 대변을 맛 보아가면서 탕제를 조절했던 효자였으며, 사후 3년만인 1789년(정조 13) 6월에 나라에서 孝行으로서 旌門을 명하기까지 하였다. 백불암은 효의 실천으로 후세 사람들은 “선생의 학문은 그 처음 근원이 효도에 있었다"고 言行錄에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최흥원 정려각(崔興遠旌閭閣) 내부 현판 (문화재청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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