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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문창공(고운 최치원선생) 영당과 영정

노촌魯村 2009. 9. 17. 08:27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문화재자료 제20호 (대구 동구).대구 동구  도동 766-4 )

고운 최치원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1912년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 시조가 남긴 업적을 후손에게 전한다는 이유 외에도 옛 현인을 모셔 백성들에게 민족의 정기를 심어주기 위한 뜻도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말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10여년 동안 중앙관직과 지방관직을 거쳐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까지 올랐다. 40여세 때 관직을 버리고 은거 생활을 하다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주위로 직사각형의 담장을 둘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솟을대문에는 태극 모양을 그려 놓았다. (문화재청 자료)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주위로 직사각형의 담장을 둘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솟을대문에는 태극 모양을 그려 놓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화재청 자료 사진

문창공영정(文昌公影幀.문화재자료 제25호 (대구 동구))

통일신라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857∼?) 선생의 초상화이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가 18세 때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며, 879년 당나라의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어 그의 문장력을 세상에 알리었다. 유교·불교·도교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력이 뛰어났으며, 이후 ‘문창공’에 봉해졌다. 선생의 초상화는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이 있는데, 이 그림은 조선 철종 11년(1860) 경에 해인사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신선세계를 배경으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며, 비단 위에 9가지 색을 이용하여 짙게 채색하였다. 최치원 선생을 신선으로 대하는 민간인들의 입장에서 그린 신선도 형식의 민화풍 초상화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문화재청 자료)

 

경운재

문창공 영당과 같은 구역내에 있는 경주최씨 재실

 경운재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