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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목조문무인상(木造文武人像)과 경주왕룡사원목조아미타여래좌상

노촌魯村 2009. 12. 23. 10:05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현판

목조문무인상(木造文武人像.시도민속자료 제73호 (경주시).경북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1)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작품(後期作品)으로 보이는 이 문무인상은 홰나무 재질(材質)로 되어 있다. 두 개의 상은 모두 통나무에 왼쪽 손만 노출시켰고 오른쪽 손은 의복 문양(紋樣) 속에 감추어진 상태를 취하였다. 문인상은 턱수염을 잡은 모습에 큰 관모(冠帽)를 썼다.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왼쪽 손은 지물(持物)을 지닌 모습이나 현재는 결실되어 있다. 투구 위에는 삼지창(三枝槍)을 꽂고 있다. 이 문무인상은 모두 이등신대(二等身大)의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 바, 이것은 이 지방의 용신신앙(龍神信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며, 약 2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것은 이곳의 지형(地形)과 토속적(土俗的)인 민간신앙(民間信仰)에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한 목제조상(木製造像)이다. (문화재청 자료)
국당리 지명 유래 : 옛날 이곳에 신당이 있었다 하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마을에서 국화재배가 잘 된다고 하여 국당리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의 외벽 벽화

 

 법당

 

법당 내부 

 

 

산령각

산령각 내부

형산 정상부의 관세음보살상 

 형산의 정상부(왕룡사원)에서 본 포항과 동해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형산(兄山)에서 본 제산(弟山) 

다음 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의 전설

형산강은 이 두 산 사이를 지나 포항으로 흘러 온다.

옛날, 형제산이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남천, 북천,기계천의 물이 안강일대에 모여 호수를 형성하였고, 범람하면 경주까지 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강의 치수문제는 신라의 숙원사업 이었다.

경순왕 김부가 왕위에 올랐을때에는 후삼국이 일어나 서로 각축을 벌였을 뿐만아니라, 나라 안에서는 사방에서 도적떼가 일어나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지는 등 신라는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형제산을 둘로 잘라 안강호수의 물을 어용사 즉 영일만으로 흘러 보내면 임정현땅의 지정왕기가 제압되어 역적이 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경순왕은 태자 김충과 의논하여 백일간의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목침으로 삼층집을 짓고 옥황상제와 천지신명과 신라왕실의 조종들에게 종묘사직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땅에서는 태자 김충이 형제산맥 단절을 천지신명께 기도하였다, 태자는 기도 끝에 큰 뱀이 되었다. 이 뱀은 사람들이 그를 용으로 불러 줘야만 용이 될 수가 있으므로 길가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들이 용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아무도 용이라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큰 뱀을 보고는 두려워서 달아나기만 하였다.

왕과 약속한 백일이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은 날이었다. 크게 낙심을 하고있는데 마침 안강에 사는 한 노인이 유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손자를 업고 지나다가 큰뱀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저런 큰 뱀도 이 세상에 있는가?"하고 말했다. 그때 업혀 있던 손자가 "할머니!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이에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뱀에서 용으로 변한 태자는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니 형제산은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고 그 틈으로 안강호수의 물과 경주에서 내려오는 물이 강을 이루어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니 지금의 형산강이다

뱀을 용으로 불러 준 아이에게 안강호수에 물이 빠진후 생긴 땅과 그 일대의 논밭을 주고 들의 이름은 아이의 이름을 따라 유금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강동면의 유금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 되었다.

형산 산정의 왕룡사라는 절에는 김부대왕과 김충태자의 목상을 세워 재향을 하고 그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경주왕룡사원목조아미타여래좌상(慶州 王龍寺院 木造阿彌陀如來坐像.보물  제1615호 )

이 불상은 복장에서 발견된 「환성사미타삼존조성결원문(還城寺彌陁三尊造成結願文)」을 통해 1466년에 조성역사를 시작하여 1474년에 비로소 완성되었으며, 불상의 조성발원에는 왕실종친부 및 지방관료·양반·양민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불상의 제작은 양수(良手) 대선사(大禪師) 성료(性了)와 부양수(副良手) 선사(禪師) 혜정(惠正)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무릎이 넓고 둔중한 것에 반해, 어깨는 상대적으로 좁고 허리는 길어져 전반적으로 늘씬한 비례를 보여준다. 특히 머리 폭이 좁고 끝이 뾰족한 팽이형의 머리와 고려후기 불상에 비해 양감이 줄어든 수척한 얼굴, 좁게 연 가슴, 왼쪽 어깨 부근의 칼날형태로 접은 주름, 왼쪽으로 치우쳐 표현된 Ω형 주름 등은 1458년에 조성된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28호)의 양식계를 잇고 있고, 양쪽 무릎 앞에서 표현된 예리한 각을 이루며 활처럼 휘어진 주름과 무릎 위쪽에 형성된 돌출주름 등은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 등 조선전기에 제작된 불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주름 표현이다. 이 불상은 「조성결원문」을 통해 불상의 제작연대는 물론 조성·봉안장 소, 그리고 조각승을 비롯한 조성주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조선 초기 불상의 기준자료이며, 특히 이 불상은 전통불상의 토대 하에 조선 초 새롭게 유입된 외래양식을 적절하게 수용하여 만든 불상계통으로 모든 면에서 국보 제228호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비교되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며, 확실한 제작연대를 가진 조선초기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로 조선초기 조각양식의 성립과 흐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