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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송광사(순천 松廣寺)

노촌魯村 2010. 5. 8. 07:20

 

 

 

 

 

 

 

 

청량각

 

 

 

 

 

 하마비

 순천 송광사(순천 松廣寺사적  제506호.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등)

순천 송광사는 송광면 신평리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오랜 불교 역사 속에서 전통승맥을 계승한 승보사찰(僧寶寺刹)로, 합천 해인사(法寶), 양산 통도사(佛寶)와 더불어 삼보사찰(三寶寺刹)로 불리고 있다. 지금부터 800년전 보조국사 지눌이 당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고 우리 불교의 전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벌였던 도량(道場)이며 지눌, 진각을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외국 승려가 수도하는 국제 선원으로 한국불교문화를 연구하는 도량(道場)이다. 신라말 혜린선사가 길상사로 창건후 고려명종27년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대찰을 이룩했고 희종4년 지금의 송광사로 개칭했으며 조선헌종8년 큰 화재후 철종7년 중창하였으나 1948년 여순사건, 1951년 공비만행으로 대웅전등 주요건물이 소실되어 1984∼1988년까지 제8차에 걸친 불사중창으로 대웅전등 33동이 복원되었다. 특히 목조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16국사영정을 봉안하는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등 국보 3점,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대반열반경소, 16국사 진영, 경질, 경패, 묘법연화경찬술, 금동요령등 보물 16점, 천연기념물인 쌍향수등 국가 문화재 21점과 능견난사, 금강저, 팔사파문자, 우화각, 자정국사사리함등 지방문화재 12점을 포함 총 33점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송광사일주문(松廣寺一株門시도유형문화재 제4호 (완주군))

종남산 기슭에 있는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지은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단정하고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하는 조선 중기의 일주문이다(문화재청 자료)

 

 

 송광사 조계문(일주문) 소맷돌(생각에 잠긴 사자상 ?)

송광사 조계문(일주문) 소맷돌(생각에 잠긴 사자상 ?)

 

삼청교와 우화각(松廣寺 三淸橋와 羽化閣)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다리(삼청교)와 그 위에 지은 건물(우화각)이다.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고도 한다. 19개의 네모난 돌로 무지개 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무지개 모양의 중심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다. 조선 숙종 33년(1707) 다리를 만들었고, 그 뒤 6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에 보수를 거쳤다. 삼청교 위에 지어놓은 우화각은 사람들의 통행을 돕고자 만든 것이다. 들어가는 입구는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와 비슷한 팔작지붕을 올렸고, 나가는 쪽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나가는 쪽의 지붕이 옆 건물과 가까이 닿아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본다. 비록 웅장한 모습은 아니나, 두 유물이 다리역할도 하면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도 하는 2중 효과를 보이고 있다. 삼청교와 우화각은 밑에는 홍교로 되어 다리역할을 하고 그 위로는 건물이면서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재미있는 구조이다. 먼저 우화각을 보면 기단은 바로 홍교의 상층부분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평면을 이용하였고 양편에 긴 장대석 4개를 연결시켜 낮은 난간을 삼았다. 주춧돌은 약간 높은 원형을 놓았고 기둥은 원형인데 전면은 추녀 밑에 활주를 세웠다. 포작은 주심포인데 주첨차는 교두형이며 행공첨차는 초각을 하였다. 그리고 들어가는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고 나가는 쪽의 지붕 끝은 맞배형으로 처리하였다. 이는 아마도 바로 곁에 있는 건물과의 공간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홍교의 구조를 보면 19개의 방형 장대석을 짜 올려 홍예를 이루었으며 양측면도 역시 다듬은 방형 장대석을 쌓아올려 가중을 지탱케 했다. 홍예형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가 돌출해 있다. 이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50년(1774)에 쓴 「능허교중창기」에 의하면 이 다리는 원래 만든 다리였던 것 같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구기순치구년중창판평교수교자종감아력오십오년지강희사십육년정해시수석홍교수교자행운야역육십칠삼지 건융삼십구년인구제증담이개작자령역약‥‥(…舊記順治九年重創板平橋水橋者宗鑑也歷五十五年至康熙四十六年丁亥始樹石虹橋水橋者行雲也歷六十七霜至 乾隆三十九年因舊制增當而改作者令役也…)」라 하였다. 숙종 33년(1707)에 오늘의 홍교를 조성한 후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뒤에 다시 홍교를 중건했던 것으로 보인다淸橋와 羽化閣)(순천시청 자료)

 

 

 

세월각(松廣寺 洗月閣)

송광사 일주문 안쪽 삼청교와 우화각 앞에 위치한 건물로 척주당과 함께 두 동이 직각을 이루며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서 천도재를 지내기 위한 영가들의 관욕소로 알려져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매우 작은 규모의 맞배집으로 봉두를 각한 초익공 구조이며 연목은 각개를 사용하였다. 좌측 기단부에 아궁이가 있으며 배면 기단부에 배연을 위한 간단한 굴뚝이 위치하는데 실제로 불을 땐 것인지 영가를 위해서 형식적으로 불 넣는 의식을 하기 위한 것인 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세월각은 일주문 쪽을 향하여 배치되었는데 이곳은 여자영가를 위한 관욕시설이다. ‘조계산송광사지’에 1933년 여름에서 가을동안 기산스님 주지 당시에 세월각 부근 축대를 쌓은 기록이 있다(순천시청 자료)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松廣寺 普照國師 甘露塔)

송광사 설법전 오른쪽, 지금의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는 불일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감로탑이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감로탑은 맨 아래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놓고 그 위로 네귀퉁이에 각을 이룬 또 다른 대좌를 끼워 넣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매우 특이한 형식이다. 맨 아래 2단의 정사각형 대좌는 그 위에 있는 돌들과 석질이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위에는 희미하게 연꽃무늬를 새긴 복련석이 몸돌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감로탑은 보조국사가 고려 희종 6년(1210)에 열반하자 왕으로부터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와 ‘감로탑’이라는 탑호를 받았으나, 3년 뒤인 강종 2년(1213)에 세워졌다. 그 동안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졌으나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 있다. 맨 아래 바닥 돌을 제외하고 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지붕돌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둥근 공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의 모습은 고려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 불일 보조국사의 감로탑은 송광사 설법전 우측 현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중 제1세이며 또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국사는 세수 53세, 1210년(희종 6) 음력 3월 17일 열반하였다. 그 해(1210년) 희종이 ‘불일 보조국사(佛日 普照國師)’란 시호와 ‘감로탑(甘露塔)’이란 탑호를 내렸으나 바로 탑비와 탑이 세워지지 않고 3년 뒤인 1213년(강종 2) 음력 4월 10일에 현 설법전 뒤편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감로탑의 외형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정형화된 팔각원당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맨 하단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안치하고 그 위로 네 귀퉁이에 각을 이룬 호형의 대좌를 삽입하였는데, 이 같은 형식은 매우 특이한 것이라 하겠다. 또 맨 밑의 2단 정사각형의 대좌는 상단으로 연결된 석질과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 위로 다시 정사각형의 하대석이 연결되는데, 한 돌로 이어진 윗면에는 희미하게 장식된 2단의 복련석이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8각의 옥개석이 이어지고 그 위로는 상륜부가 솟아 있다. 이 감로탑은 그동안 여섯 번이나 옮겨졌다고 하며 현 위치가 원래 세웠던 자리인데 1213년에 세운 보조국사비문, 조계산 산내탑비소재총람도, 1886년의 송광사건물배치지도, 1950년의 송광사전경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감로탑은 덧붙여진 기단부 하단의 일부 지대석(3단)을 제외하면 모두 원형을 고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이 부도에서 특이한 것은 옥개석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그리고 원구형을 이루고 있는 탑신의 양식은 고려시대말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 부도에서 탑신이 원구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 홍법국사실상탑(1017년)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그 뒤 고려 말의 경기 회암사지 나옹선사부도 및 지공선사부도, 충북 영진국사부도, 강진 백련사 원묘국사 중진탑이라 전해지는 원구형 부도 등 상당수가 있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1213년에 설법전 뒤에 세워진 이래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이동이 있었으나 현재는 원래 위치에 있다. 그리고 이동과정에서 기단부 일부만 덧붙여졌을 뿐 별다른 변화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불교결사운동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보조국사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순천시청 자료)

     

송광사 비림

허망 권력으로 세운 공덕비가 소맷돌로 되어 버린 역사의 현장 바로가기

 http://blog.daum.net/bosar/13431386

 

 송광사 봄 꽃들(사진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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