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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낙안읍성(樂安邑城)

노촌魯村 2009. 11. 3. 07:30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현재85세대 229명이 살고 있음)에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낙안읍성(樂安邑城.사적  제302호.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내리) 

낙안(樂安)은 백제(百濟)때부터 읍치(邑治)가 있었다고 하며, 고려말(高麗末)에는 왜구(倭寇)의 피해로부터 주민(住民)을 입보(入保)시키기 위하여 토축(土築)의 읍성(邑城)이 축조(築造)되었다. 1397년(태조(太祖) 6)에 김빈길이 백성을 동원하여 토성(土城)을 쌓은 것이 현재 낙안읍성(樂安邑城)의 전신(前身)이 되며, 세종대(世宗代)에는 둘레 592보(步)의 석축(石築)으로 읍성(邑城)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축성(土築城)의 석축화(石築化)는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전반적(全般的)인 추세였으며, 왜구(倭寇)가 예상되는 남해안지역의 읍성(邑城)이 맨 먼저 석축화(石築化)되었다. 이어서 세종(世宗)·문종대(文宗代)에 이르러 읍성(邑城)의 방어력(防禦力)을 높이는 국가적(國家的) 규모(規模)의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게 되었는데, 문종원년(文宗元年) 8월(八月)의 기록에 낙안읍성(樂安邑城)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둘레가 2,865척(尺)이고 성벽의 높이는 평지(平地)에서는 9척(尺)5촌(寸)이었고, 지형이 높은 곳에서는 8척(尺)5촌(寸)이었다. 그 위에 여장(女墻)의 높이가 2척(尺)5촌(寸)이 더하였고, 적대(敵臺)(치성(雉城))는 12개가 계획되어 4개만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성문은 3군데인데 옹성(擁城)이 없었으며 성안에는 우물 두 곳과 작은 못 2개가 있고, 성벽 둘레의 해자(垓字)는 아직 시설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고을의 진산(鎭山)인 금전산(金錢山)의 남쪽으로 낮아진 구릉에 동(東)·서(西)로 길다란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을 이루고 있는 성벽은 성돌의 축조방법이 전형적(典型的)인 조선초기의 읍성형식(邑城形式)을 취하고 있다.
성밖에는 동천(東川)과 서천(西川)이 자연해자(自然垓字)를 형성하고 있으며, 성벽은 높이 4m 쯤이고 두께 3∼4m인데 아랫부분의 폭은 7∼8m이다. 성벽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오르면서 석재(石材)가 차츰 작아지고 기울기를 주어 쌓았고, 안쪽에서 성벽 위로 오르는 계단 모양의 좁은 통로도 만들어져 있어 세종대(世宗代)에 새로 규정한 「축성신도(築城新圖)」의 규식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이 성에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오고 있다. 당초 성문은 남문에 쌍청루(雙淸樓)가 있고, 동(東)·서문(西門)에도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19세기(世紀)에 이르러 남문(南門)은 진남루(鎭南樓)라 하고 동문루(東門樓)는 낙풍루(樂豊樓), 서문루(西門樓)는 낙추문(樂秋門)이라 하였는데, 남(南)·동문루(東門樓)는 이층(二層)이었다. 이밖에 적대(敵臺)(치성(雉城))는 6개가 있었다고 하며 주로 동문방향(東門方向)에 배치되고, 문(門)에는 옹성(擁城)이 있었다. 남문 서쪽에 수구(水口)가 남아있고 치성(雉城)은 7m 크기의 방형(方形)이어서 조선시대 읍성연구(邑城硏究)의 귀중한 자료(資料)가 된다.
성내(城內)에는 객사(客舍)·임경업장군비각(林慶業將軍碑閣)과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로 지정된 민가(民家) 9동(棟)이 있고, 또한 전통적(傳統的)인 가옥과 옛 건물터가 남아있어 고풍(古風)을 간직한 가장 전형적인 고장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동문루(東門樓)는 낙풍루(樂豊樓)

 

   

 

 

동문(낙풍루) 밖의 성벽

 동문(낙풍루)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동문(낙풍루) 북쭉 성안과 성벽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동문(낙풍루)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동문(낙풍루) 안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임경업장군비각(林慶業將軍碑閣) 


 

군수 임공 경업 선정비

   

 


낙민루

 



낙민루

 

 

낙민루 현판






 

객사(낙안지관)

객사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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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안객사(樂安客舍.시도유형문화재 제170호 (순천시))

조선시대 건물로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예를 올리고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수 이인이 세종 32년(1450)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승주문헌집』에 인조 9년(1631)과 철종 8년(1857)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 중심 건물만 남아 있었는데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하다가 1982년 수리하였다. 총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앞면 3칸짜리 건물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이 대칭으로 붙어 있는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본 건물은 앞뒤로 간략하게 맞댄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는 반면, 부속 건물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앞면에 연봉오리와 연꽃 모양으로 장식해 놓았지만 부속 건물에는 모두 잘라 간소하게 꾸몄다. 한편 본 건물에 전패를 두었으나 학교 건물로 사용하면서 전패 봉안처는 없어졌다. 안쪽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객사에 맞는 색상과 문양은 잘 남아있는 편이다. 특히 용 몸 모양의 대들보 양 끝에 남아있는 문양은 옛 법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있던 주변 건물들은 없어졌지만 대체로 일반적인 객사의 양식을 갖춘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예를 올리고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던 건물이다



 

 

 

동헌(사무당)

동헌(사무당) 정문 수문장






 

 동헌(사무당) 

사무당使無堂(사무송使無訟 : 잘 다스리어 송사訟事 또는 시비가 없도록 함)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당초 성문인 남문에 쌍청루(雙淸樓)

 쌍청루(雙淸樓) 현판

 

 당초 성문은 남문에 쌍청루(雙淸樓)와 성벽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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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 호송 수레

 

 

 

 


낙안성내 노거수(은행나무)

 

대장간

 

 

 


물레방아

 

 

 

 

 

 

 

 

 

 

 

 

 

 

 

 

 

 

초가 지붕 교체 작업

 

 

 

 

 

 

 

 

 

 

 

 

 

 

 

 

 

 

 

 

 

 

 

 

낙안읍성 동문 앞의 삼일운동기념탑

 낙풍루 앞의 고인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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