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전문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나 북장대가 주는 위엄 있는 옛스러움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 모습을 한 이곳은,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1세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우리나라 목탑을 형상화하여 설계한 건물이다.
임진왜란실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보물 제391호.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30-30 육군박물관)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비단바탕에 그려진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에 처음 그려진 것을 화가 변박(卞璞)이 영조 36년(1760)에 다시 그린 것인데 처음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전투장면을 내려다 보듯 묘사하였는데, 그림 오른쪽 중간에 부산진 성곽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을 왜병 및 왜선이 빈틈없이 에워싼 모습은 아군과 적군의 심한 전력의 격차를 보여준다. 그림의 작품성은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되지는 않으나, 나라를 수호하는 민족정기를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문화재청 자료)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보물 제392호.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30-30 육군박물관)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선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고 구도나 형태, 필치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중완구(中碗口.보물 제858호.경남 진주시 남성동 171-1 국립진주박물관)
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부르며 유통식(有筒式) 화기의 한 종류로 조선 태종 때 최해산이 만들었다고 한다. 완구는 크게 완(碗), 격목통(激木筒), 약통(藥筒)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완은 발사물 즉 큰 돌이나 쇠공을 올려 놓는 곳으로 그릇 모양을 하고 있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으로 점화선을 끼우는 점화구멍을 2개 가지고 있다. 약통과 완 중간에는 격목통이 있는데 이 곳에는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폭발력을 완에 전달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격목이 있다. 전체 길이 64.5㎝인 중완구(中碗口)로 1985년 경상남도 하동군 동화리에서 등산하던 주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선조 23년(1590) 9월에 함경도 지방의 이물금(李勿金)에 의해 만들어졌고, 한 번 포탄을 발사하면 사정거리가 1리(里)에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완구는 함경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후 임진왜란 때 도주하는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이 곳 경상남도 하동까지 운반된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지하에 매몰된 상태였지만 전혀 외상이 없고 만든 기술이 정교하며 주조시기가 확실하고, 임진왜란 때 직접 사용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유물로 화기사 발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자료)
쇄미록(瑣尾錄.보물 제1096호.경기 용인시 (국립진주박물관 보관))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희문 자신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분이 두터운 많은 고을수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보를 입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각 지역의 전투현황과 각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한 살인과 약탈행위, 명나라 군대의 무자비한 약탈과 황폐화, 전란에 따른 피난민사태, 군대징발, 군량조달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문화재청 자료)
최희량임란첩보서목(崔希亮壬亂捷報書目.보물 제660호.전남 나주시 (국립진주박물관 보관))
이것은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당시 흥양(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현감으로 있던 일옹 최희량(1560∼1651)이 당시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관찰사에게 왜적을 격파한 전과보고 문서들이다. 최희량은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전관으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의 부하로 있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후에 원종공신에 올랐다. 원래는 따로 흩어져 있던 것을 공의 후손인 최기정이 서목의 뒤에 19절지로 배접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이 첩책 표지에 최기정이 ‘최일옹파왜보첩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각 문건마다에 백지 또는 붉은 종이를 표지로 붙여 내용분류를 쉽게 하였다. 이 문건의 내용은 현지에서 작성한 전과보고서로, 그 여백에 상관이 회답을 적어보내는 형태의 당시 공문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또한, 왜적들과 싸워 크게 승전을 거둔 전말을 담고 있어 다른 기록에는 있지 않은 귀중한 사실이 이 서목을 통해 새로이 밝혀졌다. 이것은 당시 공문서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가정을묘명천자총통(嘉靖乙卯銘天字銃筒.보물 제647호.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박물관 )
총통은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화포(火砲)이다. 천(天)자는 천자문의 첫 자로 만든 순서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총 길이 1.31m, 통신 길이 1.16m, 포구 지름 12.8㎝로써 포 입구 띠를 제외한 마디는 모두 8개이다. 총신 포구 쪽에는 탄약을 장전하는 약실을 향하여 가로로 ‘가정을묘시월천사백구십삼근십냥장양내요동(嘉靖乙卯十月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이라는 글이 음각 되어 있어, 조선 명종 10년(1555)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총통은 우리나라 화포 중 가장 큰 화기일 뿐 아니라, 그 명문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방 과학기술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천자총통은 砲身(포신)의 길이가 130cm로서 鐵羽(철우)가 달린 길이 113cm의 大將軍箭(대장군전)을 발사했다. 地字총통은 포신의 길이 89.5cm로서 100.9cm의 將軍箭 1발 또는 새알탄(鳥卵彈) 200발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다.
대구동화사사명당유정진영(大邱 桐華寺 泗溟堂 惟政 眞影.보물 제1505호.대구 동구 도학동 35 )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기품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좌측 하단의 묵서명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이란 연호가 있어 1610년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료이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22.9 x 78.8cm (문화재청 자료)
김시민선무공신교서(金時敏 宣武功臣 敎書.보물 제1476호.경남 진주시 남성동 169-17 )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에게 내린 선무공신 교서이다. 선무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 10월에 임진왜란 때 전공을 크게 세운 장군들에게 내린 것으로,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총 18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 공신교서는 김시민 장군의 공적과 그에 따른 포상내역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존하는 선무공신교서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임진왜란사 연구와 고문서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38.4 x 287.0cm(본문 37.2 x 222.5cm) (문화재청 자료)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1604년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을 기리기 위한 전공의 내용. 김시민 및 그의 부모와 자손들에게 내리는 포상의 내용을 적어 임금이 내리는 글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일본 고서화 경매시장에 출품되어 그 존재가 알려지면서, 2006년 6월 말 MBC TV 프로그램<느낌표-위대한 문화유산 74434>와 문화연대-문화유산위원회, 진주 시민이 하나되어 국민 모금 운동을 적그 전개해 이 공신교서를 2006년 7월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
권응수초상(權應銖肖像.보물 제668-1호.부산 북구 (국립진주박물관 보관))
조선시대 무신이었던 권응수(1546∼1608) 장군이 쓰던 물건 및 임금에게 하사받은 물건과 집안에 내려오던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권응수 장군의 영정이다. 권응수 장군은 선조 17년(1584)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 영정은 선조(재위 1567∼1608)가 하사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104㎝, 세로 220㎝이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가슴에 호랑이 흉배가 있는 단령을 입고 있다. 장군이 선무공신에 오르면서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17세기 초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이다. 일부 훼손되었으나 보존상태가 좋고 세부묘사와 전체적인 안정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문화재청 자료)
권응수장군유물(權應銖將軍遺物.보물 제668호.(국립진주박물관 보관))
조선시대 무신이었던 권응수(1546∼1608) 장군의 유물들로 장군이 쓰던 물건 및 임금에게 하사받은 물건과 집안에 내려오던 유품들을 모은 것이다. 권응수 장군은 선조 17년(1584)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르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유물의 내용을 보면 권응수 장군의 영정, 선무공신교서, 태평회맹도병풍, 장검, 유지 및 장군간찰, 교지 및 유서, 각대, 가전보첩 2첩 등이다. 권응수 장군의 모습을 담은 영정은 선조 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장군이 선무공신에 봉해질 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선무공신교서는 공신에 봉한다는 공신도감의 증명서이고, 태평회맹도병풍은 비단 위에 임진왜란 때의 공신을 그린 4폭 병풍이다. 장검은 일본검으로 임진왜란 때 권응수 장군이 왜군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유지는 선조의 작전문으로 29매이며, 편지인 간찰은 4매이다. 벼슬 4품 이상의 명령문인 교지와 장군의 유서는 합쳐서 33매로 되어 있다. 각대는 허리띠인데 금속으로 되어 있다. 『가전보첩』은 상·하 2첩으로 되어 있는데 시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시의 서체와 시문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
역사문화실
차륜식토기(車輪飾土器.보물 제637호.경남 진주시 남성동 171-1 국립진주박물관 )
수레바퀴가 붙은 높이 18.5㎝, 길이 24㎝의 가야 토기로 출토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받침은 이 시대 굽다리 접시(고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이 벌어진 나팔형인데 긴 직사각형의 굽구멍(투창)이 4개 뚫려 있다. 받침 위에 U자형의 뿔잔(각배)을 얹어 놓고, 그 등에는 양쪽으로 고사리 모양 장식을 했으나 한쪽은 없어졌다. 고사리 모양의 장식은 가는 흙 줄을 양쪽으로 말아서 만든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U자형의 뿔잔은 액체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보인다. 뿔잔의 좌우 측면에 수레바퀴를 부착시켰는데, 둥근 바퀴는 축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모양의 창을 6개 뚫어 바퀴살을 표현하고 있다. 회흑색의 바탕 흙은 쇠가 녹슨 듯한 색깔을 띠며, 전형적인 가야 토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 오리모양·인물모양·말모양·배모양 토기들처럼, 단순하고 환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는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들의 신분해방이었다. 이때 백정들 가운데는 일반인을 능가하는 자산가가 많았고,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시대적 각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봉건적 성향이 농후한 영남지방에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형평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두암실
재일교포 실업가 고 두암 김용두 선생이 수집한 우리 문화재 179점 중 80여점을 선별하여 전시. 국외로 유출된 문화재를 뜻있는 개인의 노력으로 환수하여 고국에 기증한 것을 기념하여 마련한 전시실
야외 전시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에 무슨 일이 있었나?
(출처 : YouTube)
앉혀진 채로 위에서 칼로 세 차례나 살해를 당한 20대 여자의 유골.
조총이 뒤에서 뚫고 나간 흔적을 보여주는 5세 이하 유아의 부서진 두개골.
부산의 한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굴된 유골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400년 만에 나타난 유골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임진년 오늘, 바다 건너 도적떼 몰려와
성이 함몰되었소...
온 고을 사람들 한꺼번에 피로 물들고
시체더미 쌓인 아래 투신하여
백 명, 천 명에 한 둘 살았소
그래서 이 날이 되면 제사지내 곡하는데
아버지가 아들 위해 곡하고
자식이 아버지 위해 곡하며
할아버지 손자 위해 곡하고
손자는 할아버지를 곡하며
어미가 딸을 곡하고
딸이 어머니를 곡하며
아내가 남편을 곡하고
남편이 아내 곡하며...
그래도 곡하는 사람은 슬프지 않소
칼날 아래 모두 죽어
곡할 사람도 없는 집안이 얼마이리오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의 시 - 동래맹하유감(東萊孟夏有感)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