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성(1681-1743)
자는 성재(聖載), 호는 국담(菊潭), 칠원무기(漆原舞沂)사람으로 주세곤(周世坤)의 후인, 각(珏)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범아(凡兒)와 달라 가업은 생각치않고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영조 4년(1728)에 이인좌(李麟佐)등이 역란을 일으키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창의하여 낙동강을 건너 대구에 이르렀는데 관찰사 (觀察使) 황준(黃준)이 크게 기뻐하며 『유자(儒者)의 흉중(胸中)에 이러한 갑병(甲兵)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김해 7읍의 군졸(軍卒) 3천을 보태주어 분치령(分峙嶺)을 방어케 하였는데 영호(嶺湖)의 인후(咽喉)였다. 군중(軍中)에 군구(軍具)와 식량이 부족하매 자신의 가산을 털어 군졸을 먹이니 사기충천하여 역적 정희량(鄭希亮)등을 섬멸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이제 군졸들은 국담공의 은덕에 보답코자 귀로에 공(公)의 구원(丘園)에 소지(小池)를 파고 이어(鯉魚)를 방사(放飼)하여 산수지락(山水之樂)을 누리시게 하였는데 『국담(菊潭)』이라 명명(命名)한 이 연못은 중요민속자료 제208호 이다. 이후에 선생을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성현(聖賢)의 학문탐구에 전심전력하였으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선생이 돌아가신 3년(1945)뒤에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의 증직이 내려졌고 1783년 영남유생의(嶺南儒生) 상소에 따라 정여(旌閭)가 내렸다.
함안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중요민속자료 제208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하환정(중요민속자료 제208-1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함안 무기 연당 연못가에 세운 정자이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연못 왼쪽편에 하환정이 자리잡고 있는데,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로 연못쪽에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1칸은 방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아 놓은 작은 건물이다.
국담(중요민속자료 제208-3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함안 무기 연당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 일대 의병을 모아 이끌던 주재성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만든 연못이다. 관군들은 이 마을의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파고 이름을 국담이라 하였다. 또한 직사각형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들어 석가산이라 부르고, 석가산을 쌓은 당주는 양심대라 불렀다고 한다.
풍욕루(중요민속자료 제208-2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함안 무기 연당의 누각으로 연못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댓돌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