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남

함안 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

노촌魯村 2010. 9. 18. 09:42

 

 

 

 

 

 주재성(1681-1743)

자는 성재(聖載), 호는 국담(菊潭), 칠원무기(漆原舞沂)사람으로 주세곤(周世坤)의 후인, 각(珏)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범아(凡兒)와 달라 가업은 생각치않고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영조 4년(1728)에 이인좌(李麟佐)등이 역란을 일으키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창의하여 낙동강을 건너 대구에 이르렀는데 관찰사 (觀察使) 황준(黃준)이 크게 기뻐하며 『유자(儒者)의 흉중(胸中)에 이러한 갑병(甲兵)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김해 7읍의 군졸(軍卒) 3천을 보태주어 분치령(分峙嶺)을 방어케 하였는데 영호(嶺湖)의 인후(咽喉)였다. 군중(軍中)에 군구(軍具)와 식량이 부족하매 자신의 가산을 털어 군졸을 먹이니 사기충천하여 역적 정희량(鄭希亮)등을 섬멸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이제 군졸들은 국담공의 은덕에 보답코자 귀로에 공(公)의 구원(丘園)에 소지(小池)를 파고 이어(鯉魚)를 방사(放飼)하여 산수지락(山水之樂)을 누리시게 하였는데 『국담(菊潭)』이라 명명(命名)한 이 연못은 중요민속자료 제208호 이다. 이후에 선생을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성현(聖賢)의 학문탐구에 전심전력하였으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선생이 돌아가신 3년(1945)뒤에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의 증직이 내려졌고 1783년 영남유생의(嶺南儒生) 상소에 따라 정여(旌閭)가 내렸다. 

 

 

 

함안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중요민속자료 제208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주재성의 생가에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이다.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이다.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산의 모양을 본떠 놓았다. 이후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이라 하고 호를 삼았으며,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였다. 연못의 서북쪽에는 오래된 정침 한 채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을 고쳐서 그 가치를 잃고 말았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풍욕루'와 '하환정'을 지었고, 최근에 '충효사'를 지었다. 연못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영귀문'이라 하였다.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정원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하환정(중요민속자료 제208-1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함안 무기 연당 연못가에 세운 정자이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연못 왼쪽편에 하환정이 자리잡고 있는데,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로 연못쪽에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1칸은 방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아 놓은 작은 건물이다.

 

 국담(중요민속자료 제208-3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함안 무기 연당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 일대 의병을 모아 이끌던 주재성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만든 연못이다. 관군들은 이 마을의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파고 이름을 국담이라 하였다. 또한 직사각형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들어 석가산이라 부르고, 석가산을 쌓은 당주는 양심대라 불렀다고 한다.

 

풍욕루(중요민속자료 제208-2호.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966)

함안 무기 연당의 누각으로 연못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댓돌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세웠다.

 

 

 

 

 

 

'경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진정(無盡亭)  (0) 2010.09.18
고려동유적지(高麗洞遺蹟址)  (0) 2010.09.18
무산사(武山祠)  (0) 2010.09.17
산청 한의학박물관  (0) 2010.09.05
진주박물관  (0) 2010.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