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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노촌魯村 2011. 4. 5. 17:13

최치원의 사산비문
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4개의 비문.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萬壽山)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初月山)의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희양산(曦陽山)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등에 적힌 문장을 가리킨다. 소재지는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화개면(花開面) 쌍계사, 충청남도 보령시(保寧市) 성주면(聖住面) 성주사터,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외동읍(外東邑) 숭복사터, 문경시(聞慶市) 가은읍(加恩邑) 봉암사이다. 850년 입적한 진감선사의 일대기를 서술한 진감선사비문은 신라 정강왕(定康王)의 명을 받아 886년 찬술되었고 비는 887년 건립되었다. 888년 입적한 낭혜화상의 비문은 889년 찬술되었고 비는 890년 세워졌다. 신라 왕실과 관련된 숭복사의 건립과정을 밝힌 대숭복사비문은 888년 또는 889년 찬술되었고 비는 896년 세워졌다. 882년 입적한 지증대사의 생애를 서술한 지증대사비문은 893년 비문 찬술이 완성되었고 비는 924년 세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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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국보  제47호.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 쌍계사)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 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그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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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정 광스님이 쓰신
<지증대사비명 소고>에 실린 <쌍계사 진감선사 비명 번역>에서

유당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익진감선사비명 병서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함이요 사람에게는 이국이 없는지라,
그런 까닭으로 해동의 자손들이 불자가 되고 유학자가 됨에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에 배를 띄워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배움의 여로를 치달을 새,
목숨은 일엽편주에 맡기고 마음은 중국과 천축에 매달아,
허로 가서 실로 돌아오며, 선은 어려우나 후는 얻게 됨이
마치 옥을 캐는 사람이 곤륜산의 높음을 꺼리지 아니하고,
구슬을 더듬어 찾는 사람이 여룡이 졸고있는 구렁텅이의 깊음을
사양치 않는 것과 같았음이로다.
드디어 지혜의 횟불을 얻은즉 오승을 융통하고,
진귀한 술과 안주를 얻은즉 육적을 배불리게 하는지라,
다투어 천의 문중으로 하여금 선행에 들게하며,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흥인케 하거늘,
배운자가 혹 이르기를
<석가와 공자의 설교한 것이
흐름을 나누고 형체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다 모난 나무끌을 박는 것과 같아
서로가 모순이라>하며 걱정으로 가득차 고집을 버리지 못하니,
시험하여 논하리이다.
시문을 설하는 자가 글자로써 언어를 해하지 말 것이며,
언어로써 그 뜻을 해하지 말 것이니,
마땅한 바가 있다.>하심이라.

고로 노봉 혜원이 논저에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과 더불어 그 이치의 출발은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바는 한가지이니,
형체의 지극함을 겸응치 못하는 자는 사물을 능히 겸수치 못하는 연고라.>하였고,

심약이 말을 전하되
<공자는 그 실마리를 발기하였고, 석가는 그 의취를 끝까지 파 헤쳤다.>했으니
진실로 가위 그 크기를 아는 분들이라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말하겠도다.

이에 이르러 불교의 마음법은
현묘하고도 또한 현묘하여 명칭으로 가히 이름짓지 못하고 설로도 가히 말할 수 없는지라,
비록 달을 가리킴에 손가락 쳐다보는 것을 쉬고 혹 좌망한다 일렀으나,
그것은 마침내 바람을 붙잡아 매려는 것과 유사하고
그림자를 잡으려 하는 것같이 어려운 것이로다.
그러나 높이 오를려면 가까이 낮은 곳에서 부터 시작한다 하니
비유를 취한들 어찌 상할 것이리요.

또한 공자가 문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이 없고자 하노라, 하늘이 무슨 말을 하리오.>하였으니
곧 저 유마거사가 문수보살에게 묵대한 것과 선서가 가섭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수고로이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능히 마음에 인을 찍어 화협한 것이라,
내고향을 빛낸 분이 어찌 다른 사람이리오,
선사가 그분이니라.
선사의 법위는 혜소요, 속성은 최씨이니 그 선조가 한족이라,
산동에서 관개벼슬을 지냈으니,
수나라 군사가 요동을 정벌할 때 다수가 고구려에서 죽었을 새,
항복하여 난민이 된 자로 있다가 후에 당이 사군을 낭괄함에 이르러
지금의 전주 금마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창원이라 하니 재가에 출가의 행이 있었고,
어머니는 고씨이니 일찌기 낮에 잠깐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범승이 일러서 말하기를 <제가 어머니의 자식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인하여
유리병으로써 의탁하는 징표를 삼더니 얼마 아니되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 울지를 아니했으니,
세상에 일찍 태어나 소리를 녹여버리고 식언한 승아가 빼어남이라,
이미 치아를 갈고, 놀적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으로 삼고,
꽃을 꺾어 공양구로 삼으며,
혹 서쪽으로 정좌하여 그림자가 옮겨갈 때까지
오래도록 동요치 아니하곤 하였으니 이로 알라,
선한 근본을 진실로 백천겁 전에 심어놓았던 바이라,
가히 발꿈치를 들고 바라다보아 미치는 바가 아니로다.
유년으로 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뜻이 부모님 봉양에 간절하여 규보에도 불망하되 ,
집안에는 한말의 식량도 비축된 것이 없으며 또한 농사를 지을 한평의 땅도 없으니
가히 천시를 훔치는 자이라,
부모님 구복의 봉양을 오직 자력으로 이를 보살펴야 하였으므로
물고기를 팔아 효를 다하고 생계의 업을 넉넉케 하였다.
손으로는 그물을 짜는데 힘썼던 것이 아니고,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어버리고 능히 콩나물만으로라도 풍족히 여기었는지라
진실로 난초를 캐어다 공양하는 채란의 음영에 맞았음이로다.
부모상을 당하매 흙을 져다 분묘를 만들고나서 이르기를
<길러주신 은혜는 오로지 힘을 다하여 갚았거니와 듣고도 알지 못하며,
잡고도 얻지 못하는 포고의 지취는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아니하리오.
내 어찌 얽매인 고아처럼 삼십대 장령에도 발걸음을 묶어 두리오.>하고
드디어 정원 20년(서기804년, 애장왕 5년)에 세공사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될 것을 구득하여 발을 서해의 파도에 얹을 새,
궂은 일에도 다능하고 험한 파도를 오랑케의 땅으로 보아
자애로운 항해의 노를 저어 고해를 가르고 건넜다.
피안에 도달하여서는 국사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에게는 각각의 뜻이 있사오니 청컨데 이를 쫓아 작별하겠습니다.>하고
드디어 걸음이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배알하니 미쳐 몸을 구부리기도 전에
대사가 홀연히 이르기를
<기약없이 이별한지가 얼마 멀지 아니하거늘 기뻐게 다시 서로 만났도다.>하고
조속히 삭발염의하여 심인법을 돈수케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붙이고 낮은 들판으로 물을 흐르게 하는 것과 같았다.
도반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동방의 성인을 이에 다시 본다.>하더라.
선사는 용모가 암연하여 대중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지목하기를 <흑두타>라 하였으니,
이는 곧 현묘함을 더듬어 묵묵히 처신함이 진실로 칠도인의 후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라.
어찌 저 읍중의 자우가 능히 군중들의 마음을 위로한 것에 비교할 뿐이리오.
가히 불타적자와 달마청안과 더불어 색상으로써 현시한 것이로다.
원화 5년(서기810년)에 호산 소림사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곧 어머니의 태몽과 완연히 부합함이더라.
이미 계주를 밝히고 다시 강당으로 돌아가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
꽃보다 붉고 남색보다 푸르러 제자가 스승을 능가함이러라.
비록 명경지수처럼 맑은 마음이나 일편단운처럼 방랑하는 자취이더니,
이에 향승 도의가 있어 먼저 화하에서 도를 탐방하던 중이라,
우연히 만나매 서로 원에 맞아 서남에서 벗을 얻었는지라
멀리 사방으로 찾아다니며 불지견을 증명하였다.
의공은 앞서 고국으로 돌아가고,
선사는 곧 종남산으로 들어가 만인의 산봉우리에 올라가 송실을 먹으면서
지관으로 적적히 한 것이 삼년이요,
다시 함곡관 밖의 자각으로 나와 네거리의 길에 당도하여
짚신을 삼아서 널리 보시하며 왕래한 것이 또한 삼년이라.
이에 고행을 이미 수료하고 다른 지방을 또한 돌아다녔으니,
비록 빈것을 본다고 한들 어찌 능히 본분을 잊으리오.
이에 대화 4년(서기 830년)에 귀국하여 대각하신 상승으로 우리 어진 강역을 비출 새,
흥덕대왕이 봉필을 날려 맞이해 위로하며 이르기를
<도의선사가 이전에 이미 돌아와 머물고, 상인이 잇다라 이르러니 두 보살로 삼나이다.
예전에 흑의의 호걸을 들음이러니 이제 누갈의 영웅을 봄이라
미천의 자위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뢰하오리니
과인이 마땅히 동계림의 지경으로써 길상의 거택을 이루도록 시행하리이다.>하였다.
비로소 석장을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서 쉬게 되매,
의사에게는 병든자가 많듯이 방문자가 구름같은지라
방장실은 비록 용납함이 넓다하나 물정에는 좁게 여기었다.
드디어 걸음이 강주 지리산에 이르니,
몇마리 호랑이가 효공하면서 앞을 인도하되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을 좇게함이 마치 유순한 길잡이와 다르지 아니한지라,
따르는 자들도 두려워하는 바 없이 기르는 개같이 여기었다.
곧 선무외삼장이 영상에서 결하할 새 맹수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깊이 산혈에 들어가 석가모니의 입상을 본 것으로 더불어 완연히 사적이 같음이요,
저 축담유가 조는 호랑이 머리를 두드려 청경케 한 것도 오로지 승사의 미담만이 아니로다.
인하여 화개곡 고 삼법화상의 난약유기에 당우를 과수하니
엄연한 것이 법화경의 화성과 같더라.

개성 3년(서기838년)에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깊이 현자에 의탁하고자 옥서를 내리고 제비를 보내면서 특별히 견원을 구하였다.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선정을 닦고 계시거는 무엇하려 보기를 원하리오.>하였다.
사자가 왕께 복명한 데로 들르시고 부끄러워하더라.
그런즉 선사는 색공이 쌍민하고 정혜가 구원하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리되 혜소라 하니 <소>자는 성조의 묘위를 피하여 바꾸니라.
인하여 대황룡사에 관적케 하고 경읍으로 들도록 당부할 새
사자의 왕복한 것이 도로에 교차하였으되,
이르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게 하여 대통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함과깊숙한 곳에 깃드리어 고상한 성품을 기르심이 시대는 다르나 취지는 같도다.
거한지 수년에 청익자가 도마와 같이 성열하여 거의 송곳을 꽂을 땅도 없거늘,
드디어 기경을 두루 살펴 남령의 기슭에 터를 얻으니 양명하고 고적하여 거하기 최적한지라,
선려를 짓기 시작할 새 뒤로는 노을이 낀 산봉우리를 의지하고,
굽어보면 구름이 낀 시내를 내려다보니
안계를 틔어 맑히는 것은 강을 격하여 멀리 연한 묏부리들이요,
이근을 시원하게 하는 것은 암석에 부딪쳐 흩어져 날으는 여울물 소리로다.
더구나 봄 시내에 피는 꽃과 여름 길에 그늘진 소나무와 가을 구릉에 비친 달빛과
겨울 높은 산에 쌓인 눈은 사시에 변태하여 만상이 교광하며,
백뢰는 화음하고 천암은 경수하니,
일찌기 서토에서 놀던 사람들이 이에 이르러 머물고는
모두가 놀란 눈으로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의 동림사가 옮아 신라에 돌아온 것 같은지라,
연화세계는 범인의 생각으로 가히 헤아릴 바가 아니나
호중에 별다른 천지가 있다고 한 것이 곧 진실이로다.>하더라.
가죽으로 유수를 끌어 들이어 섬돌을 둘러 사방에 물을 대고
비로소 옥천이라 방을 하여 사용하였다.
법윤을 손가락으로 꼽으면 곧 선사는 이에 조계의 현손이라.
시이로 육조의 영당을 채식분용하여 널리 도수함에 의뢰하였으니
경에서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한 연고로>문채를 섞어 중상을 그린 것이로다.
대중 4년(서기850년) 정월 9일 새벽에 문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만법이 계공하니 나는 장차 돌아가리로다.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거라.탑으로써 장형치 말며,
명으로써 기적치 말라.>하시고 말을 마치매 좌멸하니, 보년이 77이요, 적하가 41이었다.
그 때 하늘에서 섬운도 없이 풍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 목매어 울며,
기목과 노송이 변하여 시들더니 잠시 뒤에 자운이 허공을 가리고
공중에서 탄지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장사에 모인 사람들은 듣지아니한 이가 없었다.
곧 양사에 실리기를 <    >
하였으니 성감으로 명응한 것을 어찌 속이리오.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음신을 부쳐 서로 조문하고
정을 잊지 못한 사람들은 슬픔을 머금고서 울었으니
천인의 통탁함을 단정하여 가히 알겠도다.
영함과 유수를 미리 구비케 하여 제자 법량등이 호읍하며
색신을 받들어 날을 넘기지 않고 동봉의 이마에 하관하니 유명을 도수함이러라.
선사께서는 성품이 박실함을 잃지 아니하고,
말은 기계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옷은 온분도 따스히 여기고, 음식은 강흘도 달게 여겼으니,
꿀밤과 콩을 섞은 밥에 소채좌반이 두가지가 없더라.
명위가 귀달한 사람이 때에 오더라도 일찌기 다른 반찬이 없어
문인들이 좋지 못한 음식이라는 생각으로 드리기 어려워하면 이르시기를
<마음이 있어 이 곳에 왔으니 비록 여반이나 어찌 방해로울 것이요.>하고
존비와 질치를 여일하게 접대하였다.
매양 왕인이 있어 역마를 타고 와서 전명하되 <멀리서 법력을 비신다.>하면 이르시기를
<무릇 왕토에 거하여 불일을 정대한 사람으로 누가 마음을 기울이어 호념하며
임금을 위해 저복치 아니할 것이기에
또한 하필 멀리 고목 교주같은 사람에게 관언을 더럽히리오.
전승이 주림에 능히 먹지 못하고 목마름에 능히 마시지 못하니 참으로 가념토다.>하였다.
혹 호향으로써 증증한 사람이 있으면 기와로써 당회를 삼아 환을 짓지 아니하고
이를 태우면서 이르시기를 <내 알지 못할새라.무슨 냄새뇨.건심할 뿐이로다.>하였고
다시, 다시 중국의 차로써 공양한 사람이 있으면
땔나무로써 돌솥애 불을 지펴 가루를 내지 않고 이를 다리면서 이르시기를
<내 알지 못할새라.무슨 맛이뇨.뱃속을 적실 뿐이로다.>하였으니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거슬러심이 모두 이와 같으시더라.
평소에 범패를 잘하시어 금옥같은 그 음성으로 곡조를 굴척하여 소리를 날리매,
상쾌하고 애완하여 능히 제천으로 하여금 환희케 하며
길이 원지에 까지 유전케 하였는지라.
학자들이 만당하되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을새,
지금 동국에서 어산의 묘음을 익히는 사람들이 다투어 엄비하듯이 하여
옥천의 여향을 본받았으니 어찌 성문으로써 제도하신 바의 교화가 아니리오.
선사의 니원은 문성대왕의 조에 해당하였는데,
임금이 선금에 슬퍼하사 장차 정시를 총사하려 하다가
유계를 들음에 미쳐 부끄러이 여기고 이를 그만 두시었다.
이에 삼기가 지나자 문인들이 능곡으로 변할 것을 염려하여
불후의 인연을 모법하는 제자에게 물었더니
내공봉인 일길간 양진방과 숭문대 정순일이 단금같은 마음이 되어
돌에다 새길 것을 이에 주청하였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교화를 회홍하시며
진종을 흠앙하사 추시를 <진감선사 대공영탑>이라 내리고
전각을 허락하여 이로써 길이 종예토록 하였다.
아름다워라.해가 양곡에서 출하매 유심한 곳에 비추지 아니함이 없고,
동해의 언덕에 향기를 심으매 오래도록 미방하리로다.
혹 이르기를
<선사께서 불명불탑의 계를 내리셨거늘
서하의 도제에 항급하여 능히 확고하게 선사의 뜻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구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준 것인가.적족히 백규의 티가 됨이로다>하거늘 ,
희라 그르다고 하는 자도 또한 잘못이니 명을 가까이 아니해도
이름이 저절로 드러남은 대게 정력의 여보라.
그 회멸하여 전절키 보다는 어찌 가위를 가위의 때에 하여금
명성을 대간의 세계에 떨침과 같을 것이리오.
귀부에 비석을 얹지 아니하여 용이 갑자기 승천하
지금의 헌강왕이 왕위를 이어 대업을 일으키니 훈지가 상응이라
뜻이 맞아 부촉하니 선한 것은 따르시었다.
인악의 초제로서 옥천의 호가 있어 이름이 소루되어 중이를 치혹케 하는지라
장차 하여금 동명을 버리고 이명에 나아가려고 하면
마땅히 구명을 버리고 신명을 쫓아야 하리라 하여
사자를 보내 그 절의 침의한 바를 살펴보게 하니
곧 산문이 복간으로 상대하여 임했다 하거늘 이에 쌍계라 제하여 내리었다.
거듭 명을 신에게 내려 이르시기를
<대사는 행도로써 현덕하고 그대는 문필로써 진사하였으니 마땅히 비명을 지어라.>하거늘
치원이 배수하여 이르기를 <예, 그렇게 하겠나이다.>하고 물러나와 생각하니
근래 중주에서 이름을 얻어 장구 사이에 유전을 작저하였으나
능히 구준에 진취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우물 속의 진흙과 벽돌 사이를 기어다닌 것을 깊이 부끄러워 하노라.
하물며 법은 문자를 여의었을 새 말을 둘 땅이 없음이요,
구차스럽게 혹 말을 할지라도 수레채를 북쪽으로 향하고서
남쪽 초도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로다.
다만 국주의 외호와 문인들의 대원은 문자가 아니면
능히 군목을 초초케 하지 못할 새 드디어 감히 몸은 양역을 좇고 힘은 오능을 본받았으니
오직 돌에 혹 정신이 붙어 말을 할 것 같으면 가히 부끄럽고, 가히 두려울 것이나
도라는 것도 강명한 것이니 무엇을 옳다하고 무엇을 그르다 하리오.
굴필하여 장봉하는 것을 곧 신이 어찌 감당하리오.
거듭 전의를 펴서 삼가 찰명하여 이르노라.

두구 서나로 불타에 귀심하니
근숙보살의 홍원에는 다른일이 없었네.

용맹스레 호굴을 더듬어 멀리 경파에 배를 띄웠으니
서거하여는 비인을 전해받고 동래하여는 신라를 교화하였다.

유심한 곳을 찾아 승경지를 가려 암등에 복축하니
수월은 금회를 맑히고 운천은 흥취를 부치었네.

산은 자성으로 더불어 숙연하고 곡은 범패로 더불어 화응하였으니
경계에 부딪쳐 무득함이 기계가 돈식한 그 증거로다.

도덕은 오조가 칭찬했고 위엄은 중요를 꺾었사오며
묵묵히 자음으로 드리워 현현히 가초를 거절하였네.

바다는 스스로 표탕하나 산이 어찌 동요하리오
사도 없고 려도 없어 착하지도 아니하고 조하지도 아니하였다.

음식은 겸미치 아니하고 의복은 필비치 아니했으니
풍우가 몰아쳐 그뭄밤 같아도 시종이 일치하였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빼어남이라 법의 동량이 갑자기 떨어졌으니
동학은 처량하고 연라는 초최하였다.

사람은 가고 없되 도는 남아 있으니 끝내 가히 잊을 수 없는지라
상사는 진원하고 대군은 유은하였네.

법등은 해동의 후예들에게 전하고 탑은 운근에 솟았으니
천의로 이 돌을 필진토록 길이 송문에 빛날지어다.

광계 3년(서기887년, 원성왕 원년) 7월 건립함.승 환영이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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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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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승탑(河東 雙磎寺 僧塔.보물  제380호.경남 하동군  화계면 운수리 산47-1)

쌍계사 북쪽 탑봉우리 능선에 위치한 이 탑은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승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고 위는 머리장식부분이다. 기단은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8각의 가운데받침돌을 올렸다. 그 위로 다시 솟은 연꽃무늬를 새긴 윗받침돌을 올려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다. 기단 위에는 두꺼운 괴임돌이 삽입되어 눈에 띄는데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있다. 탑신의 몸돌은 밋밋한 8각이다. 지붕은 넓으며 밑면에는 서까래인 듯 보이는 받침을 두고 있다. 추녀는 끝에서 위로 들려있고 여덟 곳의 귀퉁이 끝에는 아름다운 꽃조각이 앙증맞게 솟아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있고 짧은 기둥 위로 타원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모든 부재를 8각형으로 조성한 탑이며, 각 부의 비례가 적당하지 않고 조각도 생략되거나 형식화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탑비와 함께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자료)

숭복사지

 숭복사지 삼층석탑 

숭복사터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으로, 두 탑 모두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어서, 아래·위층 기단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특히 위층 기단에는 기둥 조각 사이의 면마다 8부중신(八部衆神:불가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여덟 무리의 수호신)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 네 면에는 문(門)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현재 두 탑은 일부 석재가 파괴되거나 없어진 채 남아 있다. 동탑은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층 몸돌과 머리장식이 없어졌고, 서탑도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3층 몸돌과 3층 지붕돌,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청)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기단부)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기단부 서면)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기단부 남면)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기단부 동면)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기단부 북면)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1층 옥신)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기단부)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기단부)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기단부 서면)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기단부남면)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기단부 동면)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기단부 북면)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1층 옥신)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숭복사지 금당터

 숭복사지 금당터(석재)

 숭복사지 금당터(석재)

 숭복사지 금당터(석재 석등의 하대석으로 추정)

 숭복사지 금당터에서 본 삼층석탑

 숭복사지 삼층석탑(서탑)

 숭복사지 삼층석탑(동탑)

 숭복사지 귀부(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지귀부 머리 부분(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지 삼층석탑 북편에 있는 현재의 숭복사

현황 :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조에 "원성왕은 나라 다스리기 14년에 세상을 따났으며 능은 곡사에 있다. 지금의 숭복사인데 최치원의 비가 있다"고 전하며, 최치원의 비문에 의하면 "숭복사는 원왕비인 숙정왕후의 외조부인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한 절인데 고니(鵠) 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므로 곡사라 했다. 그러나 원성왕릉을 풍수설에 따라 여기에 조영하게 되어 절을 지금의 숭복사로 옮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원래의 곡사 자리는 괘릉(원성왕릉)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석재들과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된 동서삼층석탑 2기가 있다(경주시사3)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제137호)

이 탑은 봉암사를 처음 창건한 지증대사(824-882) 사리가 모서져 있다. 팔각원당의 이 탑은 헌강왕 8년(882)에 세워졌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식 조각이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신라 사리탑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 너비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지증대사는 경주 김씨로 17세에 부석사 경의율사로부터 주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암사에 들어와 이듬해인 882년에 세상을 떠났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지증 탑호는 적조라 내렸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국보  제315호.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번지)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 국보 제8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자료)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국보  제8호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4)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불교신문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復字’서지학자 박영돈 씨, 마모된 107자 살려내

바로가기:http://www.ibulgyo.com/archive2007/200907/200907111247323283.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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