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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채운사(彩雲寺)

노촌魯村 2011. 5. 2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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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사(彩雲寺)은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화양천을 건너 마주보이는 첨성대 안쪽계곡에 있었다. 고려 충열왕 3년(1277)에 도일선사가 창건하고 ‘수도암’이라 하였는데, 조선 광해군 2년 혜식선사가 중창하고 ‘채운암’이라 개칭하였다. 또한 현 위치에는 효종 4년(1655) 혜일선사가 ‘환장사(煥章寺)’를 창건하였다. 그후 한말 왜병들의 방화로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되었고, 건너편에 있던 채운암이 1948년 홍수로 매몰되자 그 요사채 일부를 이 곳에 옮겨 환장사와 채운암을 합쳐 증축하고 채운암이라 이름하였다 전한다. 한편 민진원(閔鎭遠)의 단암만록(丹巖慢錄)에는 “숙종조의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의 어필 ‘非禮不動’의 휘호를 가지고 귀국하여 송시열(宋時烈)에게 주니 송시열이 화양동에서 이 글씨를 거암(巨岩)에 새기고 그 옆에 승(僧)을 모아 암자를 이룩하여 그 이름을 환장사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채운사에는 복장기를 가진 목조여래좌상이 대웅전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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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운암 목조여래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채운암 목조여래좌상은 대웅전의 중앙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조각한 것이다. 이 불상은 나발의 머리위에 두툼한 육계가 표현되었고 상호(相好)는 원만하며 백호(白毫)와 양 미안(眉·眼), 비량(鼻樑), 구순(口脣) 등이 정제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돌려있다. 법의는 양쪽어깨에 걸친 통견이며 가슴에 군의대가 보인다. 길게 흘러내린 법의는 양쪽 무릎을 덮었고 의단의 일부는 양쪽 손목에 걸쳐 옆으로 펼쳐지면서 흘렀다. 채운암 목조여래좌상은 대웅전의 중앙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조각한 것이다. 이 불상은 나발의 머리위에 두툼한 육계가 표현되었고 상호(相好)는 원만하며 백호(白毫)와 양 미안(眉·眼), 비량(鼻樑), 구순(口脣) 등이 정제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돌려있다. 법의는 양쪽어깨에 걸친 통견이며 가슴에 군의대가 보인다. 길게 흘러내린 법의는 양쪽 무릎을 덮었고 의단의 일부는 양쪽 손목에 걸쳐 옆으로 펼쳐지면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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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운사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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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사 삼성각의 칠성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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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사 삼성각의 나반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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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사 삼성각의 산신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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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사에서 본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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