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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유달산 노적봉

노촌魯村 2011. 12. 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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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노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를 본 왜적들은 저렇게 많은 군량을 쌓아두었으니 군사는 얼마나 많겠느냐며 지레놀라 도망쳤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이야기가 전해져 오며 이것은 진도의 강강술래, 영산강 횟가루, 울돌목 쇠줄 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유달산 정문격인 등구의 좌측변에 솟아있는 큰바위 봉우리. 목포시 대의동 2가 1의 120번지에 위치한 노적봉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오포대를 뒤로 하고 40m만 올라가면 바윗돌 위에 목포가 낳은 국민가수 이난영(본명 이옥례)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에는 사시사철 이난영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녹음 장치를 해놓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적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설움...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쩌다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일제하 우리 민족 모두의 망향가, 시름가, 진혼곡
종로 거리의 레코드 가게 축음기들은 밤낮없이 '목포의 눈물'을 틀어댔다. 당시 레코드 가게들이 진열장에 써 붙여 놓은 가사 앞에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가사를 외우려는 사람들로 연일 붐빌 정도였다.
'목포의 눈물'은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으니 실로 새로운 민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울밑에 선 봉선화'는 가곡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하였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랫말이 되었다. 유달산 기슭에 세워진 이 비는 1969년 6월 10일 목포악기점을 하는 박오주(朴午周)씨가 기증하여 세워졌는데 이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로서 더욱 의미가 있다.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목포시민들에게는 흘러가는 단순한 유행가가 아닌 것이다.

 

노래의 배경

19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를 대상으로 한 향토노래 공모를 했다. 이 때 목포에서 응모한 문일석(본명 윤재희)의 <목포의 노래>라는 작품이 전국 신민요가사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선정되자 당대의 유명한 손목인 씨의 작곡을 거쳐 <목포의 눈물> 이라는 노래로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는 1935년에 발표되어 일제 수탈의 서러움으로 응어리진 2천만 온 겨레의 심금을 울림으로써 가수 이난영을 전 국민적인 불멸의 가수로 기억되게 하였다.

 

 

 

 

가정을묘명천자총통은 이름 그대로 중국 가정(嘉靖) 년간 을묘년(1555)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는 천자총통을 말한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물건을 세거나 순서를 말할 때, 천자문(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그 순서를 표기한 방법에 따라 이 총통이 조선시대 가장 큰 총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崔茂宣)이 고려말에 이미 제작하였던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군화통(將軍火筒)도 이 천자총통의 전신(前身)이다. 천자총통의 제원에 관한 문헌기록은 ≪융원필비(戎垣必備)≫와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 잘 남아 있다.

 

 

오포대는 유달산 입구 이충무공 동산 남쪽에 있다. 오포대의 설치는 1909년4월이며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한 포대였다. 조선식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다. 높이5자, 구경3치5푼, 선단경7치5푼, 기부8치, 중량733근이며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요되었다한다.
조선식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다. 높이5자, 구경3치5푼, 선단경7치5푼, 기부8치, 중량733근이며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요되었다한다.
대학루 옆 암반 위에 놓여 있는 오포대(지방문화재 제138호)는 정오를 알릴 때 발표하여 일종의 신호로 사용되었다. 삼사십년 전에만해도 목포 부청에 오포대를 관리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정오가 되면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 휴지 등을 넣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펑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휴지조각들이 상공으로 흩어지는 광경이 볼만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대포를 발사하는 광경을 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시민의 종은 유달산 노적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각의 방향은 정남쪽으로 하는 것이 통례인데, 환태평양시대를 주도해 나갈 목포시의 의지를 상징하는 의미, 중국대륙을 향한 미래지향 적은 뜻에소 종의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종각의 현판은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서 유달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종을 지탱하는 상부에는 전통적인 양식에 따라 대나무 모양의 음관과 그것을 호위하는 용문양의 고리가 장식되어 있다. 종의 상대에는 8천만 겨례를 상징하는 무궁화가, 하대에는 목포의 시화인 목련이 장식되어 시민화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외곽에는 목포시으 시목인 비파나무가 조각되어 있어 목포를 상징하고 있다. 끝으로 종에는 일반적으로 비천상(염원상)이라고 하는 문양이 상징적으로 새겨지나 목포시의 기상과 염원을 표현하기 위해 목포를 상징하는 세마리 학, 즉 삼학이 힘차게 비상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지역성을 표현하고 있다.(목포시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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